[글지음][워커스 사전] 정치적 중립성

2022-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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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에서 내는 대안 월간지 <워커스>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공현 활동가가 격월로 우리 사회의 개념들을 살펴보는 글을 씁니다.

2022년 4월호에 실린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글입니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단 핑계로 청소년의 인권을 제한하는 등의 일이 자주 벌어지는데요. 중립을 지키라는 규범이 왜 등장했는지를 추적하고, 그런 요구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이야기합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6644




[워커스 사전]


정치적 중립성

    공현(투명가방끈・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2022.04.19 07:46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아 시민사회단체가 서울 지하철 3·4호선에 광고를 게재하려 했으나, 서울교통공사가 이를 불허했다. 만약 그 이유가 “얘들아 잘 지내니?”라는 문구와 삽화가 참사 희생자를 청소년의 이미지로만 한정하고 청소년을 하대하는 내용이라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허의 사유는 ‘서울교통공사의 정치적 중립성에 방해될 소지가 있다’라는 것이었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해에도 강제 전역당한 성소수자 변희수 씨를 지지하는 광고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안’이라며 거부한 적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관련 규정을 삭제하라고 권고하자, 공사는 해당 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소송 등 분쟁 중’이거나 ‘중립성·공공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광고는 게재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신설하겠다고 답했다.

‘정치적 중립성’은 청소년운동을 하면서 지겹도록 들어 본 말이다. 예컨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대자보를 붙인 학생을 교사가 교무실로 불러서 한 말은 “학교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이런 일방적 주장을 게시해선 안 된다”였다. 초·중·고 교육에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법 교육을 포함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정치적 중립성과 비슷한 맥락의, ‘정치적으로 편파적인 교육을 하지 마라’라는 것이었다. 선거권 제한 연령 기준을 만 18세로 낮추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고등학생이 일부라도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즉, 선거권 확대에 반대한 이들은 10대가, 청소년이, 고등학생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었다. 이때 주로 부딪혔던 반대 논리가 청소년은 미성숙하다는 것에 더해, 고등학생이 선거권 등 참정권을 보장받으면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고 학교가 ‘정치판’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청소년 참정권과 교육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아직도 학생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거나 규제하려 드는 학교가 많다. 정치적 이슈나 현실 선거를 다루는 교육활동은 정치적 중립성 시비에 걸릴까 봐 부담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학교에서 정치교육이나 선거교육을 널리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무성했지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그런 교육활동이 이루어진 곳은 얼마 안 되는 듯 하다. 오죽하면 정치교육 활성화를 위해 학교에서 정당, 후보자 또는 공약을 토대로 한 모의 선거나 토론 등의 교육상의 행위는 ‘공무원이 선거에 관여하는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까지 국회에 발의되어 있겠는가.


중립성 보장이 필요하게 된 역사적 경험

‘정치적 중립성’ 혹은 ‘비정치성’은 그 자체가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이자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왜 지켜야 하는지 별다른 질문도 논란도 잘 일지 않는다. 우리의 주장, 그러니까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를 배우고 싶다는 것이 왜 정치적이란 말이냐, 이것은 비정치적이고 순수(?)한 것이다, 같은 항변이 나올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과 행위가 정치적이지 않노라 변명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없다고 제한하며 깎아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정치적인지 여부에 답하기 전에, 왜 정치적 중립성이 당연한 규칙으로 자리 잡게 됐는지, 정치적 중립성이 과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적절한지를 물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헌법」은 국군, 공무원, 교육, 세 가지를 두고 ‘정치적 중립이 보장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본래 「제헌헌법」에는 이와 같은 조항이 없었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 이후 개정된 「헌법」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보장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정권의 부정 선거에 공무원과 정부 조직이 동원됐던 역사적 경험 때문이었다.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은 자유당 선거운동을 지시받았고, 교사는 학부모를 상대로 표를 모으라고 강요받았다. 그러므로 정치적 중립성 조항은 본래 공무원 등이 정권에 부당하게 동원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일종의 권리 보장이었다.1

정치적 중립성이 강조되는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4·19혁명의 예고편인 대구 2·28 학생 의거가 촉발된 것은, 학생들의 민주당 선거 유세 참가를 막기 위해 일요일에 등교시켰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학교에서 이승만 찬양 글짓기 대회가 열리거나, 각종 행사에 학생을 동원하는 등 학교 교육이 대놓고 정권 홍보의 장으로 이용되던 때였다. 때문에 4・19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이 외친 요구 중엔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교를 정치 도구화하지 마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1960년 결성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 강령 중에도 “학원의 자유와 민주화를 도모하고 정치적 중립을 기한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헌법」에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담는 것으로 이어진 것이다. “교육의 자주성과 정치적 중립성은 보장되어야 한다”라는 조문을 넣어 1963년 「헌법」을 개정한 박정희 정권이 〈국민교육헌장〉(1968)을 만들고 반공교육을 강화하고 학교를 통제한 모습을 볼 때, 과연 이후 정권이 교육을 도구로 삼지 않았는지는 심히 의문스럽지만 말이다. ‘정치적 중립성’이 중요시된 맥락과 취지는 공무원이나 교육이 정권의 자의적 권력 행사와 도구화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헌법」이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자율성을 정치적 중립성과 한데 묶어 놓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정치권력으로부터의 자율성 또는 독립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이 개념은 현실에서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성은 보장되는 권리가 아닌 의무가 돼 공무원과 교원의 자발적 정치활동을 크게 제약하고 있다.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정부나 주류를 비판하는 의견, 소수자·약자의 주장, ‘분란’을 일으키는 목소리를 틀어막는 구실이 되곤 한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교육을 가능케 하는 보호 장치이기는커녕, 현존하는 문제를 다루는 교육을 금지하고 교사·학생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억압하는 굴레에 가깝다.



중립을 넘어서 만들어야 하는 것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이제는 과거 이승만 정권 때와 같은 노골적인 도구화와 동원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세력 또한 제법 다원화됐다. 그러니 정치적 중립성도 여러 정치세력에 이용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로 넓혀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정치적 주장이나 사회 비판적 광고를 게재하지 않고, 교육에서는 국가교육 과정과 교과서를 벗어난 정치적·사회적 내용은 다루지 않는 것이 변화한 시대에 맞는 정치적 중립성의 실현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편의상 정치적 중립성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특정 정치세력이나 진영을 직접적으로 편들거나 그에 복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이 현 집권 세력뿐 아니라, 다른 정치세력에도 거리를 두고 경계하자는 것에는 일리가 있다. 공공의 자원을 사유화하거나 더 힘센 자들에게 쉽게 내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제한과 논의는 필요하다. 그리고 또 다른 차원은 어느 한 주장에 편향되지 않고, 정치적·사회적 가치 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정치적 중립성’은 사실 불가능하다. 당연하게도, 현실에서 모든 주장과 세력은 똑같은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 최근 한 트위터 사용자가 윤석열만 답변을 거부한 대선 후보 정책 질의 자료로 학교에서 토론 수업을 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성 위배된다고 주장해 빈축을 산 일이 있다. 답변이나 토론을 거부하고, 법과 윤리를 어기며 말을 바꾸는 것 모두 판단과 평가의 대상이다. 기계적 중립을 맞추기 위해 일어난 일을 지워버리거나 장단점의 수를 같게 편집하는 것은 현실을 왜곡할 위험이 더욱 크다. 더 폭넓은 사회적 이슈에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탓에 지구 온도가 상승하고 기후 위기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은 편향적인가, 아닌가?

무엇보다 아무런 가치관도, 기준도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단지 다수에게 익숙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치관은 상식이나 공리라는 이름하에 정치적 주장이나 편향으로 생각되지 않을 뿐이다. 그렇기에 정치적 중립성이나 상식, 사회적 합의를 강조하는 것은 곧잘 기존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선택으로 귀결된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광고는 사회적 합의가 안 된 사안이라 불허되지만, 이성애 중심적 일부일처 결혼제도를 전시하는 광고는 논란의 여지 없이 게시된다.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교육은 정치 편향적이지만 학교에서 경영자 마인드나 주식 투자를 가르치는 일은 성공과 생존을 위한 것이라 지지받는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사회가 이미 평평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주장을 불허하겠다는 말을 정확하게 풀어 쓰면 이렇다. “이건 우리 사회에서 용납될 만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이라는 딱지가 붙어 밀려나는 이야기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정도는 이야기해 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가치관과 기준의 폭이 좁다는 것이다. 그런 공백을 채우는 것은 현실 순응의 태도와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배금주의, 출세주의다.

따라서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운 억압 앞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은 없고 비정치는 무엇보다 정치적이다’ 같은 비판은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겠다는 판단의 기준이 어떤 것이고 어디에 기반한 것인지 살피고 꺼내놓고 토론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이 틀렸다는 겁니까? 거짓이란 건가요?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공유할 만한 가치가 아니라고 생각하나요?”라고 따져 물어야 한다. 중립성을 반박하는 것보단 사회에 공유되는 가치판단의 기준을 만들고 이동시키는 것이 진짜 과제이기 때문이다. 중립적인지 여부가 아니라, 사회의 잣대 그리고 우리가 주장하는 가치와 기준이 정당한지가 문제가 돼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운동하는 이유는, 우리의 주장과 가치 속에 보편성이 있고 잠재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면,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가닿고 공유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각주]

1. 진냥, 〈교원의 정치 기본권은 어쩌다 사라졌을까〉, 《오늘의 교육》, 2020,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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