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워커스 사전] 경쟁

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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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에서 내는 대안 월간지 <워커스> 2022년 6월호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공현 활동가가 쓴, '경쟁'에 대한 글입니다. 공공부문에 경쟁을 도입한다는 윤석열 정부 계획에 대한 비판부터 시작해서, 경쟁을 바람직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여기는 관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사회의 경쟁은 대부분 인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그로 인해 누가 이익을 얻게 되는지를 봐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6750




[워커스 사전]

경쟁

    공현(투명가방끈・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2022.06.21 07:39

                         


윤석열 대통령이 정식 취임도 하기 전에 민영화 논란이 일었다. 윤석열의 대선 공약 중 ‘의료 민영화 추진’ 등으로 해석될 만한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의힘이나 윤석열 측은 이를 허위 악선전이라고 주장했으나, 4월 28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또 다른 불씨를 던졌다. “전력 시장에서 한국전력의 독점적 판매 구조를 점진적으로 개방하겠다”, “전력 시장이 경쟁적 시장 구조로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발표였다. 인수위는 이것이 ‘한국전력의 민영화’는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전력공사라는 공기업이 민영화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전력 공급 시장이라는 공공 부문 자체를 민영화하겠다는 의미임은 명약관화하다.

한국 사회는 비교적 민영화(privatization)에 대한 반대 여론이 강고한 편이다. 그간 기업들이 일으킨 사건·사고가 많아서일 수도 있고, 안정적이고 유능한 국가에 대한 기대가 높아서일 수도 있다. 먼저 공공 부문을 민영화했다가 사달이 난 다른 나라들의 사례가 잘 알려져서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국가나 공기업이 제공하던 인프라나 서비스가 민간 자본에 넘어가는 것은 그것이 더 비싸지고 열악해질 것이라는 우려와 거부감으로 직결된다.

그런데 각도를 달리해서 살펴보면, 민영화에 비해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거나 경쟁을 통한 효율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장은 훨씬 더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다. 예컨대 한국 교육 제도에 불만이 아무리 높아도 교육 제도나 국가 교육과정 운영을 사기업에 맡기자고 하면 전혀 지지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이미 사교육이 일반적이고 학원과 각종 교육 상품이 거대한 시장을 이룬 나라다. 국가가 책임지고 제공하는 값싸고 편리한 서비스를 원하지만, 공공성을 강화하고 지키는 데는 대다수가 무관심한 나라, 그게 바로 한국이다.

그러니 ‘경쟁’은 공공 부문 민영화를 추진할 때 단골로 쓰이는 표어이자 포장지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철도 자회사를 분리하고 민간 자본 유입을 추진하며 밝힌 명분도 경쟁 체제 도입이었다. 독점은 안주와 방만, 비효율을 초래하고 경쟁은 그 자체로 효율화와 소비자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프레임이 작동한다. 일찌감치 학교나 매체에서 공급자들을 경쟁시키면 가격이 내려가고 질이 올라간다는 공식을 배우는 것도 이런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경쟁하며 살아가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보니,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공무원/공기업 철밥통 직원들도 경쟁의 채찍질을 받아야지’ 하는 심리도 적지 않게 작용하는 듯 보인다.

자본에 대한 통제, 방식으로서의 경쟁

산업에서 경쟁이 곧 선이라는 생각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론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런 논리의 원조 격인 애덤 스미스가 독점을 비판한 맥락은 자본가들의 전횡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특수 이익을 일반 이익으로 포장해 국가 정책을 좌우함으로써 독점적 지위를 얻어 내고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독점을 깨고 자유로운 무역과 경쟁을 보장할 것을 주창했다. 스미스가 비판한 자본가들의 모습은 오늘날 자신에게 유리한 법과 제도를 종용하고 공공 부문에서 이익을 추출하려는 기업들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즉, 애덤 스미스가 자유 경쟁을 주장한 것은 자본가들이 과도한 권력과 이익을 취하는 것을 막고 통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부가 독과점 기업이나 담합을 규제하는 이유는 특정 자본이 지배적인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여러 기업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함으로써 시장에서 대중의 ‘을’의 위치에 서게 하려는 것이다. 특수 이익을 무한정 추구하는 자본가들이 경쟁을 통해 서로 견제하게 만듦으로써 제어하고, 사회 전체의 발전으로 유도하려는 아이디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의 경쟁’이 자본가들을 통제하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많은 수단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스미스 또한 시장 경제가 발전할수록 독점화되는 경향이 불가피하게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반면 사회주의는 자본(생산 수단)을 시장에서의 경쟁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아이디어다. 생산 수단을 사회가 공유하며 강한 민주주의에 의해 운영하고, 애초에 특수 계급이 자기 이윤 추구에 쓰지 않게 하자는 것이다.

국가가 운영하는 공단이나 공기업은 적어도 자본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며 대의제로 선출된 정부가 관리한다는 점에서, 경쟁보다 오히려 자본을 더 강하게 통제하는 모델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한적인 민주주의하에서는 정부 정책이 정말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인민이 공기업의 공동 주인이라고 체감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사람들이 민주적 방식으로 공공 부문이나 공기업 등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느끼지 않을 때, 경쟁 체제를 통해 공공 부문을 혁신하고 효율화하자는 주장이 파고들 틈새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경쟁은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직한가

오늘날 치열한 경쟁은 한정된 자원과 보상을 획득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이를 억제하려는 것은 인위적이라는 묘사를 흔히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선 마치 완전 경쟁 시장이 바람직하다고 믿듯이, 많은 사람이 경쟁이 더 이상적인 상태라고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이 주류가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가령 기독교 사상에서는 모든 생명이 협력하고 공존하던 에덴동산이 이상적인 모습이었고, 인간은 원죄로 인해 투쟁하고 경쟁해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 내몰렸다. 로크나 루소 같은 계몽주의자들도 자연 상태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공존하는 상태라고 간주했다. 기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그 초점은 분업과 교환을 통해서 모두가 조화롭게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청사진이다.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는 말이 유명하지만, 그의 주장도 그런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지 않은가.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다른 존재와 다투어야 하는 것은 이상적이지 못하고 불행한 상태, 문제 상황으로 인식됐다.

경쟁이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자본주의적 자유 시장 경제가 전면화되고 능력주의적인 평가-선발 체제가 정착하면서였다. 경쟁하지 않으면 뒤처지고 도태되며, 경쟁을 통해 발전해야만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는 다름 아닌 사회진화론에서 유래했다. 자연과 사회를 생존 경쟁의 장으로 그리며 강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자연스럽고도 정당하다는 믿음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이는 냉전 시기를 거치며, 공산주의 국가는 경쟁하지 않아 도태됐고 자본주의 국가는 자유와 경쟁을 통해 승리했다는 도식으로 이어졌다. 현재 겉으론 사회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마저 ‘경쟁을 통한 발전과 생존’이라는 사회진화론의 유산은 충실히 내면화하고 있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대부분 인위적인 규칙과 기준에 의해 치러진다. 경쟁이 자연적이라고 한다면 그 자연스러움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측이 사회의 룰을 정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경쟁과 차별을 동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뿐이다.

또한 과거에는 경쟁 상태를 불행한 문제 상황으로 인식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경쟁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경쟁이라면, 개개인에게 요구되는 경쟁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삶을 통제하고 옭아매는 조건이다. 경쟁적인 노동 조건은 노동자가 연대하고 저항하는 것을 막고 기업의 방침에 순응하게 만든다. 경쟁적인 교육 환경은 학생의 자유 시간을 빼앗고 학생들이 학교의 평가에 연연하게 만든다.

경쟁, 특히 공개적인 경쟁 방식은 보통 효과적이며 공정함을 담보한다고 여겨지고 온갖 곳에서 일반 원리로 통용된다. 물론 공개경쟁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형식적인 개방성이나 신뢰를 높일 수 있다는 투명성 등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개방성과 투명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얼마든지 있다. 경쟁의 결정적인 장점은 경쟁에 참여하는 이들이 경쟁을 시행하는 측의 요구를 수용하고 스스로 역량을 개발하도록 만드는 이른바 ‘동기 부여’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회 전체가 이익을 얻고 발전하게 된다는 사회진화론적 논리다. 경쟁 외에도 사람들이 노력하고 역량을 발휘하게 만드는 원리는 많지만, 생존 경쟁만큼 직접적 통제가 가능하고 개개인을 원자화시키며 또 한계 이상으로 쥐어짜게 만드는 것은 드물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일부 집단의 특수 이익을 사회 전체의 일반 이익으로 위장하는 것을 경고한 애덤 스미스의 말을 떠올려 본다. 사회의 발전을 위해 경쟁이 필수적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이 경쟁이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봐야 한다. 공공 부문 혁신을 위해 더 많은 민주적 개입 대신 경쟁 체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사기업의 사업 아이템을 늘려 줄 뿐이다. 공공 부문에 개혁이 필요하다면 투명한 정보 공개와 공익적 감사, 노동자와 주민의 민주적 참여 보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

사회에 전면화된 경쟁은 개인들에게 자기 계발의 명령과 자기 착취의 채찍질을 가함으로써 경쟁을 시행하는 자들의 이익을 늘려 준다. 그리고 과잉된 경쟁은 사회 전체의 발전이 아니라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꼼수의 발달과 공익과는 거리가 먼 자원 낭비를 초래한다. 경쟁의 스트레스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철밥통’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자라나는 등 공공성과 협력의 문화가 파괴되는 문제는 말할 것도 없다. 자본주의에서의 경쟁은 결국 ‘문명’에 의해 강제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귀결된다. 다만 아마도 그 투쟁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자본과 국가는 경쟁의 트랙이 아닌 심판석과 관객석, 주최석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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