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워커스 사전] 책임

2023-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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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에서 내는 대안 월간지 <워커스> 2022년 12월호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공현 활동가가 쓴, '책임'에 대한 글입니다. 이태원 참사 등에서 나타나는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의 '무책임'한 모습에서부터 우리가 책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소수자들에게는 책임의 언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등을 논의하면서, '잘못해서 처벌받는' 의미의 책임이 아닌 다른 책임을 공유하자고 제안합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7003


[워커스 사전] 


책임


공현(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투명가방끈) 

2022.12.21 13:40



아무래도 책임은 우리 사회에서 되도록 회피하고 부정해야 할 대상이 된 것 같다. 이태원 참사 이후 고위 공직자들이 보인 언행은 ‘책임 회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정부가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배치했다 해서 예방할 수 없는 사고였다면서도, 그날 “서울 시내의 소요와 시위” 탓에 경찰력이 분산됐다고 발언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굳이 핼러윈데이 인파 운집이 “축제가 아닌 일종의 현상”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찰 등 현장 기관을 질책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비록 사람들의 공분과 비판에 발언을 철회하고 사과하기는 했지만, 사건 초기에 보인 모습이야말로 그들의 평소 입장과 공직에 임하는 자세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유명한 말과 달리, 큰 힘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책임을 피하려 하는 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자본권력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시행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가지고도 지금 정부는 기업들의 요구에 따라 사업주 · 경영자의 책임을 덜어 주려고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안전보건 책임자만 책임을 지게 한다든지, 안전보건 계획을 수립하기만 하면 의무를 다한 것으로 간주한다든지 하는 내용이다.

비정규직 문제에서도 사장의 책임 회피가 근본적인 원인인 경우가 허다하다. 파견 등의 간접 고용이나 특수고용 같은 노동 형태는 모두 노동자를 고용하면 지게 되는 각종 책임을 피하려는 꼼수에서 비롯됐다.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과 업무를 결정하는 사장들은 “나는 저들을 고용하지 않았다”라며 책임을 외주 업체로, ‘개인사업자’로 등록된 노동자 개인에게로 떠넘긴다. “진짜 사장이 책임져라!”는 10여 년이 넘게 노동운동의 단골 멘트가 됐다.


책임이 잘못이나 처벌과 동일시될 때

‘책임을 진다’라고 할 때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것은 법적인 처벌을 받거나 직에서 물러나는 모습이다. 나 역시 시위 현장에서 “책임자 처벌, 진상 규명”이라는 구호를 수백 번은 외친 탓인지, ‘책임자’는 왠지 ‘처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이 일에 대한 책임이 있다’라고 말할 때도 어떤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제공했다거나 그에 관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책임은 잘못이나 처벌, 불이익의 부담과 연결돼 인식된다.

책임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sponsibility’ 안에 response, 즉 ‘응답, 대답’의 뜻이 들어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때의 ‘대답’은 애초에 법적인 맥락에서의 개념이었다. ‘responsibility’의 어원인 라틴어 ‘respodere’는 법적 추궁에 대해 답변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후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이런 의미의 책임 개념이 쓰이기 시작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와 대표자는 국민의 요구와 비난에 대답해야 하며, 그 결과에 관해 제재받거나 처벌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1)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책임을 곧 법적인 차원에서의 잘못이나 처벌과 동일시하는 것은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책임을 법적인 의미로만 바라볼 때의 한계는 명백하다. 이런 의미에서는 유책이 곧 유죄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이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불이익을 받겠다는 뜻이니, 책임이 어떻게든 부정하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취임 후에 보인 모습이 딱 이렇다. 법조문에 적혀 있는 일만 했으면 더 이상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재판에서 패소할 만한 게 아니라면 비판도 요구도 무시하면 된다는 식이다. 대통령은 물론 검찰 출신들로 요직이 채워진 탓에 형사법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애당초 법은 완전하지도, 공평무사하지도 않다. 개인의 도덕적 · 행위적 책임만을 논하는 형사법의 접근 방식으로는 사회 구조적 문제,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 더구나 법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할 힘을 가진 사람들은 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 들고 책임을 회피할 방법을 마련한다. 그래서 큰 힘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적은 책임을 지게 되는 모순이 생긴다.


소수자들에게 묻는 책임

그런데 완전히 반대되는 방식으로 ‘책임’이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다. 바로 평등이나 자유를 요구하는 소수자들을 공박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언어다. 여성 또는 페미니스트는 군대에 가지 않으며 사회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존재로, 성소수자들은 출산하지 않고 전염병을 퍼뜨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청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으며 얌전히 학교 공부를 하지 않고, 그 미성숙함으로 인해 무책임한 존재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럴 때 소수자들은 ‘무임승차자’가 된다. 이들에게 강요되는 책임은 사회의 정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자격 조건이나 대가의 의미다.

다만 이런 주장에서 소수자들은 동시에 ‘책임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수많은 사회 문제와 불행, 문제들의 원인으로 그들이 지목된다는 의미에서다.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고 위협당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책임이고, 그들이 감히 인권을 요구하고 나선 탓이다. 최근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혐오 · 차별 선동 세력은 ‘책임과 의무는 없이’ 권리만 보장하는 학생인권조례나 체벌 금지 때문에 교육이 망가지고 있다며 학생인권 보장 제도를 축소·폐지하겠다고 나섰다. 임태희 경기도 교육감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대해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정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가 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소수자들이 요구받는 책임이라는 것이 대부분은 그런 차별과 억압을 재생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성찰하지 않는다. 책임이 대답할(response) 능력(ability)이라면, 소수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했기에 대답할 능력을 빼앗긴 이들이다. 자신의 대답을 내놓았을 때 무시당하거나 입을 다물라는 반응을 돌려받아 온 이들이다.

나아가 차별금지법이나 학생인권조례 등을 반대하는 세력은 자신들이 그것 때문에 ‘역차별’ 받는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고 이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왜 자신들을 가해자처럼 대하냐고 억울해한다.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건 오히려 저 ‘이상한/모자란 사람들’인데, 왜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더 책임지라는 거냐며 반문한다.

즉, 차별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소수자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자신들에게 책임을 부과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책임을 잘못이나 불이익과 연결하는 사고 방식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런 책임 논리의 속내를 정리하면 이렇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고, 이상하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저들에게 불이익을 주어라.’


잘못 없는 책임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책임을 잘못 혹은 불이익과 연결하는 책임론을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 없이도 서로에 대한,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진다. 물론 직접적으로 권력과 권한을 가진 사람들에게 명확한 책임을 부여하는 것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따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 다른 차원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더 포괄적이고 정치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책임이 존재한다.

인권 활동가 류은숙은 “감히 대들 수 없는 명령과 범접 못할 권력이 책임을 강제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우리에게 서로에 대한 책임을 지운다”라면서 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 이상의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역설한다.

“정치적 책임은 구조적 부정의의 피해와 균열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면세계로 도피해 윤리화되는 죄의 고백이 아니라, 공적인 장에서 당연히 져야 할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정치적 책임이다. (…) 정치적 책임이란 선의에 머무는 도덕적 태도가 아니라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시행한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일반 시민이 지는 책임이다.”2)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타자에 대한 책임이 싹트며, 그것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했다. 책임에서 ‘책(責)’은 본래 꾸짖는다, 역할이라는 의미이나, 이 한자에는 부채, 빚의 의미도 있다. 꼭 어떤 잘못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빚을 지고 지우며 살아간다는 존재의 조건이야말로 책임의 이유이다. 그리고 책임이 회피하고 싶은 부담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공동체와 관계 속에서 의미 있게 만드는 삶의 방식이자 약속으로 자리 잡을 때, 책임이 법의 언어도 차별의 언어도 아닌 자유의 언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책임의 의미와 성격에 관한 역사적 탐색〉, 《일감법학》 제42호, 이영록, 2019.

2) 《사람을 옹호하라》, 코난북스, 류은숙, 2019.




(학생인권조례에 '책임' 등을 추가하겠다며 개악을 시사한 임태희 경기도교육감을 규탄하는 2022년 11월 3일 학생저항의날 행동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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