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을 하다 보면 정말 여러 연령대, 여러 직업의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회의를 하곤 합니다. 비슷한 문제의식과 주장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한데 모여 수평적으로 회의를 하는 일은 인권운동의 매력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리에 전혀 편견이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청소년들(때론 청년들도)이 자주 듣게 되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좀 내봐라” 하는 소리도 편견이 담긴 말 중 하나입니다. 작게는 홍보물을 기획하거나 퍼포먼스를 짜는 일부터, 크게는 운동의 표어나 큰 계획을 정하는 일까지 갑자기 “이런 건 청소년들이 잘하니까” 의견을 내라고 하곤 하죠. 신선한 아이디어, 재기발랄한 기획, 창의적인 발상, 신세대 감성 뭐 그런 걸 기대한다면서 말이지요.
창의성에 대해 고민해보고 기획을 시도해본 분들은 다들 아시다시피, 청소년들이 창의적이고 새로울 거라는 기대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나이가 적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창조적일 수 있다면 브레인스토밍이니, 여섯 모자 기법이니 하는 방법론이 왜 있겠어요? 아, 회의 안건이 청소년 집단에 어필할 길을 찾는 거라면 문화나 생활패턴에 공통점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유용한 아이디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청소년들에게 특별한 창조성은 없을 가능성이 크고, 식상한 발상이 나올 가능성도 비슷할 겁니다.
무엇보다도 서두에 말했듯, 이런 요구는 청소년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다들 제각각인데, 단지 나이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창의적이거나 재기발랄할 거라는 고정관념과 이미지를 밀어붙이니까요. 또한 그런 말은 곧 청소년들이 기존 활동에 관한 경험이 적으니까 무언가 다르고 새로운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을 운동 사회 안에서 타자화하고 서로 간의 동질감과 소통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질 위험성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태도는 운동 주체들이 다같이 고민해야 할 일을 일부 집단에게만 내맡겨버린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잘하니까”라는 말은 일견 청소년들의 능력을 인정하는 겸허함 같죠? 하지만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끙끙대고 합의하는 것을 회피하고, 너희들이 알아서 좋은 결과물을 도출해서 가져오라고 외주를 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비슷한 또 다른 예로 “청소년들이 앞장서 달라”라고 하는 경우가 있겠습니다. 교육 문제나 청소년인권 문제로 모인 연대 회의에서 은근히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청소년들이 앞장서 달라, 청소년들끼리 해라, 청소년들에게 맡기겠다…’ 물론 사회적 권력관계나 관습이 작용하여 비청소년들만 목소리를 높이고 청소년들은 수동적이게 되는 현상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아예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키를 떠넘기듯이 굴거나, 발언이나 주요 역할을 청소년들에게만 해달라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청소년들을 위해 양보하거나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좋은 일을 한다고 믿는 것도 같아요.
함께 활동하려고 모인 모든 단체와 활동가들은, 그 문제가 공공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연대하고 협력하여 활동하고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이 앞장서라거나 청소년들끼리 결정하라는 등의 태도를 취하는 건 둘 중 하나이겠지요. 속으론 해당 문제가 공동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들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든지, 아니면 청소년들이 나서는 게 그림도 좋고 그 참에 비청소년들은 부담을 덜려는 것이든지. 청소년들이 나서라고 떠받드는 것은 다른 방향으로 청소년인권 의제의 중요도를 낮추고, 청소년들을 평등한 동료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런 회의 자리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첫째,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무슨 새롭거나 놀라운 사람들이 아니고, 비청소년들과 비슷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둘째, 정말 그 문제가 모두에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남들에게(특히 청소년들에게) 맡겨놓지 말고 자기 운동부터 나서야 합니다. 다들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서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 힘을 합치는 게 가장 이상적일 테니까요.
🔸 ‘공현의 투덜리즘’은 예전에 공현이 함께 만들었던 〈오답 승리의 희망〉의 간판 코너명이었는데요. 오승희를 기리는 마음으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활동가의 편지]
공현의 투덜리즘 - 청소년들한테 맡겨놓지 마세요
인권운동을 하다 보면 정말 여러 연령대, 여러 직업의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회의를 하곤 합니다. 비슷한 문제의식과 주장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한데 모여 수평적으로 회의를 하는 일은 인권운동의 매력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고 해서 그런 자리에 전혀 편견이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청소년들(때론 청년들도)이 자주 듣게 되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좀 내봐라” 하는 소리도 편견이 담긴 말 중 하나입니다. 작게는 홍보물을 기획하거나 퍼포먼스를 짜는 일부터, 크게는 운동의 표어나 큰 계획을 정하는 일까지 갑자기 “이런 건 청소년들이 잘하니까” 의견을 내라고 하곤 하죠. 신선한 아이디어, 재기발랄한 기획, 창의적인 발상, 신세대 감성 뭐 그런 걸 기대한다면서 말이지요.
게다가 이런 태도는 운동 주체들이 다같이 고민해야 할 일을 일부 집단에게만 내맡겨버린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이 잘하니까”라는 말은 일견 청소년들의 능력을 인정하는 겸허함 같죠? 하지만 부족하고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함께 머리를 맞대고 끙끙대고 합의하는 것을 회피하고, 너희들이 알아서 좋은 결과물을 도출해서 가져오라고 외주를 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비슷한 또 다른 예로 “청소년들이 앞장서 달라”라고 하는 경우가 있겠습니다. 교육 문제나 청소년인권 문제로 모인 연대 회의에서 은근히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청소년들이 앞장서 달라, 청소년들끼리 해라, 청소년들에게 맡기겠다…’ 물론 사회적 권력관계나 관습이 작용하여 비청소년들만 목소리를 높이고 청소년들은 수동적이게 되는 현상은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아예 청소년 활동가들에게 키를 떠넘기듯이 굴거나, 발언이나 주요 역할을 청소년들에게만 해달라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청소년들을 위해 양보하거나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좋은 일을 한다고 믿는 것도 같아요.
함께 활동하려고 모인 모든 단체와 활동가들은, 그 문제가 공공의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연대하고 협력하여 활동하고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이 앞장서라거나 청소년들끼리 결정하라는 등의 태도를 취하는 건 둘 중 하나이겠지요. 속으론 해당 문제가 공동의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들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든지, 아니면 청소년들이 나서는 게 그림도 좋고 그 참에 비청소년들은 부담을 덜려는 것이든지. 청소년들이 나서라고 떠받드는 것은 다른 방향으로 청소년인권 의제의 중요도를 낮추고, 청소년들을 평등한 동료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그런 회의 자리에서는 저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첫째,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무슨 새롭거나 놀라운 사람들이 아니고, 비청소년들과 비슷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둘째, 정말 그 문제가 모두에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면, 남들에게(특히 청소년들에게) 맡겨놓지 말고 자기 운동부터 나서야 합니다. 다들 나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나서서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어 힘을 합치는 게 가장 이상적일 테니까요.
🔸 ‘공현의 투덜리즘’은 예전에 공현이 함께 만들었던 〈오답 승리의 희망〉의 간판 코너명이었는데요. 오승희를 기리는 마음으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 [뚝딱 지음] 36호 전체 보기 https://stib.ee/P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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