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뚝딱 지음 68호] 공현의 투덜리즘 - '잠재적'의 문제, 의도의 문제

202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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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공현의 투덜리즘 - '잠재적'의 문제, 의도의 문제


한번씩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논란거리가 되곤 합니다. (성폭력/성차별에 관해) ‘남자가 잠재적 가해자란 말이냐?’, (학생인권 주장에 대해) ‘교사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 같은 말들이 나오곤 하죠. 그럴 때 오가는 말들을 지켜보니, 사람들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에 불쾌해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말이 사람들의 내면이나 마음속 의도를 평가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나의 안에 남에게 해를 가할 수 있는 악함이 존재한다’는 것 같은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건 ‘잠재적 가해자’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서 ‘잠재적(potential)’이란 말은, 비유하자면 물리학의 위치에너지(potential energy)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예컨대 어떤 물건이 중력장 속에서 높은 곳에 있으면 그 물건은 큰 위치에너지를 갖게 됩니다. 혹시라도 밑으로 떨어지게 되면 큰 충격을 주고받거나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현상은 그 물건의 ‘내면’이나 ‘본질’과는 상관없죠. 그저 위치 관계에 따라 더 큰 힘과 위험성을 갖게 되는 건데요. 큰 위치에너지에는 큰 조심성이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내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래에 있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관계, 차별과 폭력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조적·집단적 불평등이 있는 조건에서는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차별할 가능성, 상처 입힐 위험이 더 클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불평등을 인식하고 한층 더 주의하자는 것, 그리고 불평등을 고쳐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일 것입니다. 어쩌면 ‘구조적 가해자’ 같은 표현이 더 정확할까 싶지만, 이런 말은 또 너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인권 문제가 가지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복잡한 성격 때문일까요. 우리는 어떤 인권 침해나 부정의를 모두 가해-피해의 구도로 이해하거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경향을 갖기 쉽습니다. 콕 집어 손가락질하고 책임을 물을 대상을 정하고 싶어 하고, 인권 침해의 가해자들이 모두 악의나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상상하기도 합니다. 제가 재미있게 읽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기자가 명심해야 할 진실이 하나 있다면 어떤 일에는 항상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 즉 나쁜 놈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 밀레니엄 2부》) 추리 소설의 세계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이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수많은 현실의 문제는 별로 이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건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나쁜 놈이 존재할 거다, 그 나쁜 놈 탓이다 하는 게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비난하는 데, 어떤 집단의 단점, 악덕, 열등함을 입증하는 데 몰두하게 되기도 하겠죠. 사회 문제가 어떤 악의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상상하다 보면 음모론적인 사고방식으로 흐르게 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층건물에서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이 꼭 누군가를 상처 입히려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주의일 수도 있고, 자기가 높은 곳에 있는 줄을 몰라서, 아예 아래에도 사람이 사는 줄을 몰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선의를 갖고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할 거라 짐작하는 물건을 위험스레 던져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또한, 이는 높은 곳에 있는 ‘잠재적 가해자’를 더 착한 사람으로 바꾼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인권운동을 하면서 문제를 이해할 때 의도란 게 의외로 그리 중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가해자나 정부나, 책임을 묻는 대상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어떤 악의가 있는지를 추측하고 평가하는 것이 부질없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제가 남의 마음속에 별 관심이 없어서 더 그런 걸까요?) 그보다는 우리가 다들 자기자신과 서로가 놓여 있는 위치를, 맺고 있는 관계를 잘 살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공현의 투덜리즘'은 예전에 공현이 함께 만들었던 〈오답 승리의 희망〉의 간판 코너명이었는데요. 오승희를 기리는 마음으로 제목을 지었습니다.
🔸 사진-  2021년 양성평등진흥원이 제작한 교육 자료가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언짢으신가요?"라는 내용을 담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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