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청소년인권 기후정의선언
🔸 ‘미래세대를 위하여’가 아닌 지금 우리를 위하여 행동하자
‘우리 아이들에게 푸르른 지구를 물려줍시다!’
환경 보호 캠페인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청소년은 어른이 이끌어 온 기후위기 때문에 무고하게 피해를 본 안타까운 존재로 소비되곤 한다. ‘미래세대’나 ‘우리 아이들’ 같은 표현은 청소년을 현재의 주체로 보지 않고 미래의 피해자로 만들며, 현재는 불완전한 존재라 보호하고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 스스로 의지를 갖추고 행동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소년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기후위기를 포함한 현대 사회 문제의 당사자이다.
환경을 위해 개인적으로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잔반을 남기지 않고, 냉난방을 줄이는 청소년은 칭찬받는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책임을 물어야 할 사회 구조와 특권층에게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사회는 청소년에게 ‘너희는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에 공헌하는 게 최우선이다’, ‘아직 너희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니 나설 것 없다’ 따위의 차별적인 말을 쏟아내며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기는커녕 정보조차 제대로 얻을 수 없도록 선을 긋는다.
'성숙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미성숙한 이들'은 배제하는 사회경제 체제 아래에서, 기후위기의 피해와 책임은 기후정의를 위한 정책을 마련할 힘이 있으면서도 방임하는 부유층, 기업, 정부가 아니라 '미성숙한 이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청소년을 비롯한 몇몇 집단은 기후위기를 불러온 자본주의 체제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정치적 권리 따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기후취약계층'으로 호명되고 또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된다. 결국, 사회가 청소년에게 바라는 것은 ‘어른들 때문에 피해를 볼 미래세대’이지, 기후위기 상황에서 함께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다.
미래세대를 위해 기후위기를 막자는 말이나 교육을 통해 청소년을 성숙시켜서 미래에 닥쳐올 기후위기를 막아 줄 대비책 내지 ‘자원’으로 만들자는 말은 사람들이, 특히 정부와 기업이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하는 것을 청소년에게 떠넘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기후위기‧기후정의 집회에서 발언하는 활동가들조차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깊게 고민하기보다 ‘불쌍한 아이들’을 소재 삼아서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이런 방식의 표현은 마치 지금은 기후위기 시대가 아니지만, 미래의 아이들을 위하여 막아야 한다는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미래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모두 이미 기후위기를 마주하고 있고, 더 악화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제 ‘미래세대’라는 말은 거부해야 한다. 청소년은 ‘가여운 미래의 아이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이 기후위기 시대에서 오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선진국, 기업 등 특권층이 ‘기후위기는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면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을 규탄하고 책임을 요구하며,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행동하는 하나의 주체이다. 청소년도 비(非)청소년도 이미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다. 더는 미래를 말하지 마라. ‘미래세대를 위하여’가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후정의를 위하여 동등한 주체로서 행동하자.
🔸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취약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바꿔내자
학교 안의 청소년은 학교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낸다는 것만으로 기후위기에 더욱 취약해 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복은 각자 다른 몸이 느끼는 더위와 추위를 무시하고 획일적 복장을 강요하며 개인의 체온조절마저 학교의 규칙 아래 두는 인권침해이다. 개성실현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복제도는 태생부터 인권침해였지만, 이상기후가 계속 심화되는 현재에는 학생들에게 실질적 위협까지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학교 건물이 공공기관 건물 중 가장 저렴하게 지어지는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비청소년들이 주로 사용하는 다른 공공기관보다 열 효율이나 방한, 방열 효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는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교실에는 냉방과 난방을 제대로 제공하는 데 인색하며, 그 이유로 자원 절약을 말한다. 학생들이 체온 조절에 취약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기후위기의 심화를 냉방과 난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다. 푹푹찌는 한여름에도 교무실에 들어갈 때는 담요를 둘러야 춥지 않다는 이야기는, 과거, 현재에 학생인 적이 있는 거의 모두에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경험인데 말이다.
개개인의 취향이나 건강 조건, 양심/종교의 자유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급식제도 또한 학생들에게 에코정책을 떠밀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등장한다.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같은 양, 같은 메뉴를 배급하고 컨디션이나 개인 사정, 채식/비건을 실천하는 등의 신념에 관계 없이 잔반 없이 먹을 것을 요구하고, 학생들이 남긴 음식물쓰레기가 환경을 파괴한다고 죄책감을 심어주려 한다. 대량으로 식재료를 구입하여 대량으로 배식을 하면 남는 음식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런 시스템을 바꾸고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이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음식을 모두 먹기를 바라는 것은 타당한 일인가.
학생들은 학내에서 학교의 규칙과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 목소리를 내기 가장 어려운 집단이다. 때문에 에코 정책 등으로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참고 견뎌야 하는 자리로 밀려난다.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같은 방식으로 자원을 소모해도, 청소년은 철이 없어서, 참을성이 없어서 자원을 낭비한다 치부하며 비청소년의 필요에 비해 더욱 엄격한 잣대로 타당성을 판단한다. 인내심을 기르고, 싫은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이 모든 것들에 교육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다.
비청소년들에게 이와 같은 생활을 강요한다면, 과연 모두가 응당 그래야 한다며 감수할까? 이는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당연한 듯 강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학교라는 시설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집단으로 생활한다는 점은 이렇게 청소년들이 자신의 몫을 빼앗기는 과정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함께 생활하는 공간을 어떻게 유지/운영할 지,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아끼며, 어떤 것에는 불편을 감수하고 어떤 것에 집중할지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내고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면, 학생은 그저 학교에서 사육당하는 것에 불과한 처지가 된다. 이는 인간의 이윤을 위해 부당하게 좁은 축사에 갇혀 착취당하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이다. 인간도 동물도 그 누구도 자신의 먹는 것 입는 것 생활하는 것을 남의 결정에 따라야만 하는 삶을 강요당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교실에서 조금 더 냉난방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고, 교복이나 생활복의 디자인, 급식 메뉴 따위에 학생 앙케이트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이런 것들에 얼마나 예산을 들이고 있으며, 이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 왔는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논의하며 실제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겨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자원을 분배하던 기준, 이윤과 경제적 가치를 중점에 두고 운영했던 학교 구조 자체를 바꿔내야 누구도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 생활시간 보장과 생활 양식의 자유로 기후정의 실현하자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하루하루 돌아가는 일상에 숨이 막히도록 바쁘게 살아간다. 특히 학생이라면, 학교나 학원 등 학업과 관련된 활동이 생활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서, 기후위기를 늦추기 위해서, 청소년이 ‘지금’ 생활시간을 스스로 구성하고 생활 양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대중교통 이용하기, 쓰레기 분리수거 철저히 하기, 일회용품 대신 다회용품 쓰기 등 환경을 위한 실천은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리고 불편한 선택이다. 사회가 정말로 많은 사람이 이런 것들을 실천하길 원한다면, 응당 이런 활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활시간 통제권을 보장하고, 타인의 의지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생활 양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학교 수업과 방과 후 수업에 학원까지 가는 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능력계발'을 요구받는 대부분의 청소년에게 걸어서 이동할 시간, 일회용품에 담긴 즉석식품을 사 먹는 대신 집에서 밥을 먹고 뒤처리할 시간, 쓰레기를 올바르게 버릴 시간이 많을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지치도록 바쁜 생활을 하는 청소년에게 이런 것조차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학교라는 공간이 아니어도, 청소년은 양육자의 생활 양식에 강제적으로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청소년 본인이 채식을 원하더라도, 양육자가 육식 위주의 식단을 선호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먹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청소년이 생활시간 통제권과 생활 양식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먼저 청소년의 학습 시간을 줄여라. 대한민국 사회는 청소년에게, 특히 학생에게 너무 많은 공부량을 요구하고 있다. 학생이 아닌 청소년조차 ‘학교 밖에서 꿈을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많은 자원이 소모되는 장시간의 학습은 기후위기 시대에도 적합하지 않고, 청소년이 학업 활동 외에 본인이 원하는 활동을 선택할 기회가 줄어든다. 학교라는 공간은 특히나 ‘단체 생활’ 의 특성상 학생 개인이 원하는 활동을 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을 조정하고, 의무수업일수와 커리큘럼을 단축하는 등, 국가적, 제도적 차원에서 학습시간을 줄이려는 정책적 노력을 해야 한다.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청소년이 오랜 시간 학교에 있어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
또한, 청소년이 양육자를 비롯한 타인의 통제 아래서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식을 고를 수 있도록 하라. 청소년은 청소년 시기를 벗어나기 전, 권리를 제한해도 괜찮은 예비의 존재가 아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도,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청소년이 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청소년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
🔸 청소년을 이윤/경제성장을 위한 자원으로 여기는 입시경쟁교육을 멈춰라
한국에서 공교육은 더 이상 삶에 유용한 것을 배우고 발전시키며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권리가 아니다. 더욱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미명 하에 경쟁이 일상화된 교육은, 배운 내용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 결과에 따라 분배되는 상과 벌만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 입시를 목표로 하는 12년간의 경쟁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쟁에 승리하면 더 좋은 직업, 더 높은 소득, 더욱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허구의 약속이다. 사회는 손 쉽게 더욱 많은 자원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며,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한정된 자원을 사회가 말하는 ‘정당한 수단’을 거쳐 타인으로부터 빼앗아 쓸 수 있는 권리, 다시 말해 다른 생명체를 죽음으로 내몰 권리를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교육의 본질이 교육의 과정이나 내용이 아닌 결과에 대한 경쟁이 된 탓에 이 경쟁 자체에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자원또한 방대하다. 변별력을 위한 시험, 이를 치르는 자원과 비용은 교육의 내용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의 공신력과 위상을 지키고 이 결과에 승복하게 하기 위해서 지출된다. 개인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공부해야 하기에, 이에 매몰되어 삶의 여러 부분에 균형감있게 분배되어야 할 생활시간과 비용들이 모두 입시 경쟁을 위해 낭비되고 있기도 하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청소년은 사회 문화적/제도적으로 온갖 권리와 자유를 유예당하지만, 누군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경쟁의 본질이다. 사회는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존엄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하지 않으며, 패배했다는 사실을 본인 책임으로 전가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로 치부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간이 자연물을 인간중심적 기준으로 가공해 소비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폐기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모습과 동일하다. 지구 전체가 인간을 위해 소비되는 자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처럼, 청소년은 사회가 마음대로 가공해서 쓰다 버려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경쟁의 결과에 따라 개인의 삶의 안정, 생존이 좌우되는 현 교육시스템 속에서, 학생들은 무한경쟁을 통해 승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세계관을 학습하며 원자화되어가고 있다. 이는 인류 전체에 닥친 기후위기 앞에서, 빈곤하거나, 어리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사회적으로 경시되는 집단들이 더욱 가혹하게 그 재앙을 겪게 되는 상황을 외면하게 만든다. 때문에 인류 전체가 평등하게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 변화 모색하는 대신 자원과 능력을 갖춘 승자가 되어 각자도생할 것을 종용당하고, 그러한 이윤추구와 경쟁은 또 다시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더욱 부유한 사람/기업일수록 탄소, 석유 자원 및 에너지를 더욱 많이 소비하며, 그 결과 기후위기를 가속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화되는 기후위기에 책임이 막중한 것 또한 이런 부유층 인구/기업이다. 이러한 부정의를 말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에코'와 '그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그린워싱에 대해서만 배우며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고민은 '대학입시전형에 활용할 수 있는 것들'로 제한하고, 이는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경쟁의 승자가 되는 데에 활용된다. 인간을 소모재 취급하는 교육, 자원을 더 많이 쓰고 기후위기를 더 심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경쟁하는 교육은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
🔸 기후위기 시대에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는 더욱더 확대되어야 한다
올해 수원 시청 앞에서 이루어진 ‘다이-인(Die-in) (죽은 것처럼 드러눕는 시위 행동)’을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기획하고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동학대 논란이 있었다. 바닥의 온도가 뜨거운데 교사와 활동가가 강요했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청소년의 주체적인 행동의 의미는 사라진 채 ‘아직 미성숙해서 잘 모른다’, ‘어른들한테 선동 당한다’ 등의 정치 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하다. 다양한 우려는 청소년 자신의 요구와 필요를 탐색하고, 나아가 원하는 바를 주장할 기회를 빼앗는다. 청소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후 위기 상황,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에서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대신하겠다‘는 말은 오히려 사회 곳곳에서 청소년의 결정 권한과 정보의 접근을 가로막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초대하여 기후 위기의 해결책을 묻는 자리에서도 차별적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교육부가 진행한 기후 위기 대응 정책대화 자리에서 청소년 기후 운동 단체는 ‘탈석탄 선언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교육부 장관은 환경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달라며 청소년 활동가의 말을 가로막은 일화가 있다. 이는 청소년을 단지 정해진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대응은 환경교육이 될 수 없다. 현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환경교육은 단지 쓰레기 분리수거, 녹색소비를 알고 준수하는 태도를 기르는 대에만 그치고 있다. 자기 삶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상상을 통해 ‘탈석탄’을 요구하였지만 청소년에게 듣고 싶은 답변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청소년 참정권이나 자치, 참여권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면서 여러 공간에서 청소년이 테이블의 일원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의사결정의 권한 자체는 주어지지 않았다.
청소년이 기후 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일상적인 실천을 하는 정도의 관심은 대견해 하지만, 정치적 해결/ 대책을 요구하며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받는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시위를 참석하기 위해 학교에 결석을 하려고 했으나 체험학습 신청서를 작성해야지만 학교에 빠질 수 있었던 상황, 한 청소년 기후 운동 단체에서 지구의 날을 맞아 서울 연극제 무대 위에서 침묵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한 경우 등이 지금 현실을 보여준다. 청소년의 정치적 참여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기후 위기에 적당한 수준의 관심’만을 원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어른들이 허락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불온한 일에도 본인이 생각하고 판단하여 참여하고 기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공동체 안에서 시민이 된다는 것은 단지 참정권이라는 제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사람이자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온전하게 존중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기후 위기를 어른들이 나서서 대신 해결해 주는 것, 더 공부하고 나중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경험할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자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을 때 시민으로서의 감각도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기후 위기가 심화되고 지금의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외침 속에서 ‘청소년을 더 이상 미래에 머물러 있게 하지 마라’는 선언은 우리가 기존에 반복하던 위기의 재생산을 멈추는 일일지도 모른다. 청소년 참여 없이 기후정의는 없다.
2023년 12월 16일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청소년녹색당, 전북청소년인권모임 마그마,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모임 내다, 투명가방끈,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 전국행동
2023 청소년인권 기후정의선언
🔸 ‘미래세대를 위하여’가 아닌 지금 우리를 위하여 행동하자
‘우리 아이들에게 푸르른 지구를 물려줍시다!’
환경 보호 캠페인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청소년은 어른이 이끌어 온 기후위기 때문에 무고하게 피해를 본 안타까운 존재로 소비되곤 한다. ‘미래세대’나 ‘우리 아이들’ 같은 표현은 청소년을 현재의 주체로 보지 않고 미래의 피해자로 만들며, 현재는 불완전한 존재라 보호하고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 스스로 의지를 갖추고 행동하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청소년은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기후위기를 포함한 현대 사회 문제의 당사자이다.
환경을 위해 개인적으로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고, 잔반을 남기지 않고, 냉난방을 줄이는 청소년은 칭찬받는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책임을 물어야 할 사회 구조와 특권층에게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사회는 청소년에게 ‘너희는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에 공헌하는 게 최우선이다’, ‘아직 너희들이 잘 모르는 이야기니 나설 것 없다’ 따위의 차별적인 말을 쏟아내며 결정 과정에 참여하도록 하기는커녕 정보조차 제대로 얻을 수 없도록 선을 긋는다.
'성숙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미성숙한 이들'은 배제하는 사회경제 체제 아래에서, 기후위기의 피해와 책임은 기후정의를 위한 정책을 마련할 힘이 있으면서도 방임하는 부유층, 기업, 정부가 아니라 '미성숙한 이들'에게로 향하고 있다. 청소년을 비롯한 몇몇 집단은 기후위기를 불러온 자본주의 체제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정치적 권리 따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기후취약계층'으로 호명되고 또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된다. 결국, 사회가 청소년에게 바라는 것은 ‘어른들 때문에 피해를 볼 미래세대’이지, 기후위기 상황에서 함께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다.
미래세대를 위해 기후위기를 막자는 말이나 교육을 통해 청소년을 성숙시켜서 미래에 닥쳐올 기후위기를 막아 줄 대비책 내지 ‘자원’으로 만들자는 말은 사람들이, 특히 정부와 기업이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하는 것을 청소년에게 떠넘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기후위기‧기후정의 집회에서 발언하는 활동가들조차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깊게 고민하기보다 ‘불쌍한 아이들’을 소재 삼아서 감정적으로 호소하는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이런 방식의 표현은 마치 지금은 기후위기 시대가 아니지만, 미래의 아이들을 위하여 막아야 한다는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기후위기는 미래의 일이 아니기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모두 이미 기후위기를 마주하고 있고, 더 악화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기이다.
따라서 이제 ‘미래세대’라는 말은 거부해야 한다. 청소년은 ‘가여운 미래의 아이들’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이 기후위기 시대에서 오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선진국, 기업 등 특권층이 ‘기후위기는 모두의 책임’이라고 말하면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을 규탄하고 책임을 요구하며,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행동하는 하나의 주체이다. 청소년도 비(非)청소년도 이미 재난의 한가운데에 있다. 더는 미래를 말하지 마라. ‘미래세대를 위하여’가 아니라 지금 우리 모두를 위하여, 기후정의를 위하여 동등한 주체로서 행동하자.
🔸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기후위기 시대에 더욱 취약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바꿔내자
학교 안의 청소년은 학교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보낸다는 것만으로 기후위기에 더욱 취약해 질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있다. 한국의 거의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채택하고 있는 교복은 각자 다른 몸이 느끼는 더위와 추위를 무시하고 획일적 복장을 강요하며 개인의 체온조절마저 학교의 규칙 아래 두는 인권침해이다. 개성실현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교복제도는 태생부터 인권침해였지만, 이상기후가 계속 심화되는 현재에는 학생들에게 실질적 위협까지도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학교 건물이 공공기관 건물 중 가장 저렴하게 지어지는 건축물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비청소년들이 주로 사용하는 다른 공공기관보다 열 효율이나 방한, 방열 효율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는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교실에는 냉방과 난방을 제대로 제공하는 데 인색하며, 그 이유로 자원 절약을 말한다. 학생들이 체온 조절에 취약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기후위기의 심화를 냉방과 난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책임으로 떠넘기는 것이다. 푹푹찌는 한여름에도 교무실에 들어갈 때는 담요를 둘러야 춥지 않다는 이야기는, 과거, 현재에 학생인 적이 있는 거의 모두에게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경험인데 말이다.
개개인의 취향이나 건강 조건, 양심/종교의 자유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급식제도 또한 학생들에게 에코정책을 떠밀기 위한 수단으로 자주 등장한다.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같은 양, 같은 메뉴를 배급하고 컨디션이나 개인 사정, 채식/비건을 실천하는 등의 신념에 관계 없이 잔반 없이 먹을 것을 요구하고, 학생들이 남긴 음식물쓰레기가 환경을 파괴한다고 죄책감을 심어주려 한다. 대량으로 식재료를 구입하여 대량으로 배식을 하면 남는 음식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런 시스템을 바꾸고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이 음식물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음식을 모두 먹기를 바라는 것은 타당한 일인가.
학생들은 학내에서 학교의 규칙과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 목소리를 내기 가장 어려운 집단이다. 때문에 에코 정책 등으로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참고 견뎌야 하는 자리로 밀려난다.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같은 방식으로 자원을 소모해도, 청소년은 철이 없어서, 참을성이 없어서 자원을 낭비한다 치부하며 비청소년의 필요에 비해 더욱 엄격한 잣대로 타당성을 판단한다. 인내심을 기르고, 싫은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명목하에 이 모든 것들에 교육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한다.
비청소년들에게 이와 같은 생활을 강요한다면, 과연 모두가 응당 그래야 한다며 감수할까? 이는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당연한 듯 강요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학교라는 시설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집단으로 생활한다는 점은 이렇게 청소년들이 자신의 몫을 빼앗기는 과정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함께 생활하는 공간을 어떻게 유지/운영할 지,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아끼며, 어떤 것에는 불편을 감수하고 어떤 것에 집중할지에 대해 함께 의견을 내고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다면, 학생은 그저 학교에서 사육당하는 것에 불과한 처지가 된다. 이는 인간의 이윤을 위해 부당하게 좁은 축사에 갇혀 착취당하는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이다. 인간도 동물도 그 누구도 자신의 먹는 것 입는 것 생활하는 것을 남의 결정에 따라야만 하는 삶을 강요당해서는 안된다.
단순히 교실에서 조금 더 냉난방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고, 교복이나 생활복의 디자인, 급식 메뉴 따위에 학생 앙케이트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이런 것들에 얼마나 예산을 들이고 있으며, 이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운영해 왔는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하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논의하며 실제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생겨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자원을 분배하던 기준, 이윤과 경제적 가치를 중점에 두고 운영했던 학교 구조 자체를 바꿔내야 누구도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 생활시간 보장과 생활 양식의 자유로 기후정의 실현하자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하루하루 돌아가는 일상에 숨이 막히도록 바쁘게 살아간다. 특히 학생이라면, 학교나 학원 등 학업과 관련된 활동이 생활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서, 기후위기를 늦추기 위해서, 청소년이 ‘지금’ 생활시간을 스스로 구성하고 생활 양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대중교통 이용하기, 쓰레기 분리수거 철저히 하기, 일회용품 대신 다회용품 쓰기 등 환경을 위한 실천은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느리고 불편한 선택이다. 사회가 정말로 많은 사람이 이런 것들을 실천하길 원한다면, 응당 이런 활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활시간 통제권을 보장하고, 타인의 의지가 아닌 자신이 원하는 생활 양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학교 수업과 방과 후 수업에 학원까지 가는 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능력계발'을 요구받는 대부분의 청소년에게 걸어서 이동할 시간, 일회용품에 담긴 즉석식품을 사 먹는 대신 집에서 밥을 먹고 뒤처리할 시간, 쓰레기를 올바르게 버릴 시간이 많을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지치도록 바쁜 생활을 하는 청소년에게 이런 것조차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또한, 학교라는 공간이 아니어도, 청소년은 양육자의 생활 양식에 강제적으로 맞추어 살아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청소년 본인이 채식을 원하더라도, 양육자가 육식 위주의 식단을 선호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먹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 청소년이 생활시간 통제권과 생활 양식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요구한다. 먼저 청소년의 학습 시간을 줄여라. 대한민국 사회는 청소년에게, 특히 학생에게 너무 많은 공부량을 요구하고 있다. 학생이 아닌 청소년조차 ‘학교 밖에서 꿈을 위해서 공부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많은 자원이 소모되는 장시간의 학습은 기후위기 시대에도 적합하지 않고, 청소년이 학업 활동 외에 본인이 원하는 활동을 선택할 기회가 줄어든다. 학교라는 공간은 특히나 ‘단체 생활’ 의 특성상 학생 개인이 원하는 활동을 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등교 시간과 하교 시간을 조정하고, 의무수업일수와 커리큘럼을 단축하는 등, 국가적, 제도적 차원에서 학습시간을 줄이려는 정책적 노력을 해야 한다.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청소년이 오랜 시간 학교에 있어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
또한, 청소년이 양육자를 비롯한 타인의 통제 아래서 살아가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식을 고를 수 있도록 하라. 청소년은 청소년 시기를 벗어나기 전, 권리를 제한해도 괜찮은 예비의 존재가 아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도, 기후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청소년이 사회에서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청소년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
🔸 청소년을 이윤/경제성장을 위한 자원으로 여기는 입시경쟁교육을 멈춰라
한국에서 공교육은 더 이상 삶에 유용한 것을 배우고 발전시키며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권리가 아니다. 더욱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미명 하에 경쟁이 일상화된 교육은, 배운 내용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 결과에 따라 분배되는 상과 벌만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대학 입시를 목표로 하는 12년간의 경쟁이 목표로 하는 것은, 경쟁에 승리하면 더 좋은 직업, 더 높은 소득, 더욱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허구의 약속이다. 사회는 손 쉽게 더욱 많은 자원을 소비할 수 있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리며,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한정된 자원을 사회가 말하는 ‘정당한 수단’을 거쳐 타인으로부터 빼앗아 쓸 수 있는 권리, 다시 말해 다른 생명체를 죽음으로 내몰 권리를 위해 교육받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교육의 본질이 교육의 과정이나 내용이 아닌 결과에 대한 경쟁이 된 탓에 이 경쟁 자체에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자원또한 방대하다. 변별력을 위한 시험, 이를 치르는 자원과 비용은 교육의 내용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험의 공신력과 위상을 지키고 이 결과에 승복하게 하기 위해서 지출된다. 개인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공부해야 하기에, 이에 매몰되어 삶의 여러 부분에 균형감있게 분배되어야 할 생활시간과 비용들이 모두 입시 경쟁을 위해 낭비되고 있기도 하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청소년은 사회 문화적/제도적으로 온갖 권리와 자유를 유예당하지만, 누군가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경쟁의 본질이다. 사회는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존엄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안전망을 제공하지 않으며, 패배했다는 사실을 본인 책임으로 전가하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로 치부하고 있다. 이는 마치 인간이 자연물을 인간중심적 기준으로 가공해 소비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폐기물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모습과 동일하다. 지구 전체가 인간을 위해 소비되는 자원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처럼, 청소년은 사회가 마음대로 가공해서 쓰다 버려도 되는 존재가 아니다.
또한, 경쟁의 결과에 따라 개인의 삶의 안정, 생존이 좌우되는 현 교육시스템 속에서, 학생들은 무한경쟁을 통해 승자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세계관을 학습하며 원자화되어가고 있다. 이는 인류 전체에 닥친 기후위기 앞에서, 빈곤하거나, 어리거나, 몸이 불편하거나, 사회적으로 경시되는 집단들이 더욱 가혹하게 그 재앙을 겪게 되는 상황을 외면하게 만든다. 때문에 인류 전체가 평등하게 재난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 변화 모색하는 대신 자원과 능력을 갖춘 승자가 되어 각자도생할 것을 종용당하고, 그러한 이윤추구와 경쟁은 또 다시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더욱 부유한 사람/기업일수록 탄소, 석유 자원 및 에너지를 더욱 많이 소비하며, 그 결과 기후위기를 가속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심화되는 기후위기에 책임이 막중한 것 또한 이런 부유층 인구/기업이다. 이러한 부정의를 말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에코'와 '그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그린워싱에 대해서만 배우며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고민은 '대학입시전형에 활용할 수 있는 것들'로 제한하고, 이는 기후위기를 가속화하는 경쟁의 승자가 되는 데에 활용된다. 인간을 소모재 취급하는 교육, 자원을 더 많이 쓰고 기후위기를 더 심화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경쟁하는 교육은 지금 당장 멈춰야 한다.
🔸 기후위기 시대에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는 더욱더 확대되어야 한다
올해 수원 시청 앞에서 이루어진 ‘다이-인(Die-in) (죽은 것처럼 드러눕는 시위 행동)’을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기획하고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동학대 논란이 있었다. 바닥의 온도가 뜨거운데 교사와 활동가가 강요했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청소년의 주체적인 행동의 의미는 사라진 채 ‘아직 미성숙해서 잘 모른다’, ‘어른들한테 선동 당한다’ 등의 정치 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하다. 다양한 우려는 청소년 자신의 요구와 필요를 탐색하고, 나아가 원하는 바를 주장할 기회를 빼앗는다. 청소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후 위기 상황,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에서 당사자일 수밖에 없다. ’어른들이 대신하겠다‘는 말은 오히려 사회 곳곳에서 청소년의 결정 권한과 정보의 접근을 가로막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을 초대하여 기후 위기의 해결책을 묻는 자리에서도 차별적인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교육부가 진행한 기후 위기 대응 정책대화 자리에서 청소년 기후 운동 단체는 ‘탈석탄 선언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교육부 장관은 환경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달라며 청소년 활동가의 말을 가로막은 일화가 있다. 이는 청소년을 단지 정해진 ‘교육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대응은 환경교육이 될 수 없다. 현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대부분의 환경교육은 단지 쓰레기 분리수거, 녹색소비를 알고 준수하는 태도를 기르는 대에만 그치고 있다. 자기 삶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기후 위기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상상을 통해 ‘탈석탄’을 요구하였지만 청소년에게 듣고 싶은 답변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청소년 참정권이나 자치, 참여권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확대되면서 여러 공간에서 청소년이 테이블의 일원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의사결정의 권한 자체는 주어지지 않았다.
청소년이 기후 위기에 대해 걱정하고 일상적인 실천을 하는 정도의 관심은 대견해 하지만, 정치적 해결/ 대책을 요구하며 기후정의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받는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시위를 참석하기 위해 학교에 결석을 하려고 했으나 체험학습 신청서를 작성해야지만 학교에 빠질 수 있었던 상황, 한 청소년 기후 운동 단체에서 지구의 날을 맞아 서울 연극제 무대 위에서 침묵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한 경우 등이 지금 현실을 보여준다. 청소년의 정치적 참여를 불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어른들의 입맛에 맞는 ‘기후 위기에 적당한 수준의 관심’만을 원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어른들이 허락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불온한 일에도 본인이 생각하고 판단하여 참여하고 기획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공동체 안에서 시민이 된다는 것은 단지 참정권이라는 제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사람이자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온전하게 존중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기후 위기를 어른들이 나서서 대신 해결해 주는 것, 더 공부하고 나중에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경험할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자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을 때 시민으로서의 감각도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기후 위기가 심화되고 지금의 체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외침 속에서 ‘청소년을 더 이상 미래에 머물러 있게 하지 마라’는 선언은 우리가 기존에 반복하던 위기의 재생산을 멈추는 일일지도 모른다. 청소년 참여 없이 기후정의는 없다.
2023년 12월 16일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청소년녹색당, 전북청소년인권모임 마그마,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모임 내다, 투명가방끈, 학생인권법과 청소년인권을 위한 청소년-시민 전국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