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공동논평] 누구의 허락도 필요없다 - 정부는 ‘낙태죄’ 개정입법예고안 철회하고, 청소년의 임신중지권 보장하라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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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허락도 필요없다
- 정부는 ‘낙태죄’ 개정입법예고안 철회하고, 청소년의 임신중지권 보장하라



10월 7일, 대한민국 정부는 ‘낙태죄’ 폐지에 따른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입법예고안을 발표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있은 지 약 1년 반 만의 일이다. 정부의 개정입법예고안은 임신 14주 이전의 인공임신중절만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사실상 ‘낙태죄’ 유지 법안이다. 국가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처벌해온 역사를 이어가겠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개정입법예고안에는 의사의 진료거부권을 명시하고, 임신 14주 이후 임신중지를 하는 경우 상담과 숙려기간을 의무화하는 등 임신중지에 장벽을 만드는 조항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언론은 이번 입법예고안이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는 안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개정입법예고안은 사실상 청소년의 임신 중지를 크게 제한하는 내용이다. 만18세 미만의 모든 청소년은 시술을 위해 상담사실확인서를 제출해야 한다. 특히 만16세 미만의 청소년은 기본적으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아야만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다. 법정대리인이 없거나,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학대상황에 처해 있음을 증명하는 공적 자료를 제출해야만 법정대리인 동의 없이 시술을 할 수 있다. 사실상 법정대리인 동의를 의무화하는 조항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공적 자료는 아동학대범죄 관련 법률에 의거한 응급조치결과보고서, 긴급임시조치결정서 등으로 사법적 절차를 거쳐야만 제출 가능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팀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율은 2015년 2.16%로, 매우 저조하다. 이렇듯 아동학대가 신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청소년이 공적 자료를 통해 학대상황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우리 사회는 극단적이고 물리적인 폭력 사례만을 아동학대로 인식하며, 아동청소년이 경험하는 일상적이고 잠재적인 통제와 폭력에는 침묵한다. 이런 현실에서 학대상황을 증명해야 하는 조항은 당사자에게 아동폭력에 대한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또다른 폭력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학대상황에 처해있지 않은 청소년 역시 법정대리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임신중지권은 누구의 허락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민 개인의 재생산권이자,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권리를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인격이다. 청소년의 권리가 법정대리인에게 종속되어 있는 현실은 청소년을 인권의 사각지대로 내몰았다. ‘낙태죄’ 폐지를 시작으로, 청소년의 권리가 법정대리인에게 종속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

그간 우리 사회는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해왔다. 청소년의 성은 금지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보호라는 명목으로 성적 정보에 접근할 권리 역시 차단되었다. 그러나 청소년이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미성숙해서도, 판단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국가는 개인의 능력을 탓하며 권리를 박탈하는 게 아니라, 청소년이 안전하게 임신, 출산, 임신중지를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아니라, 평등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적 경험을 할 수 있고, 임신중지에 대한 쉽고 구체적인 정보를 접할 수 있으며, 임신중지나 출산을 선택하더라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다. 정부는 이번 개정입법예고안을 발표함으로써, 청소년의 성적 권리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책임을 방기했다.

우리는 이미 임신중지를 낙태죄로 처벌하고, 임신중지를 원하는 청소년에게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요구해온 역사가 어떠한 폭력을 낳았는지 알고 있다. 2012년, 한 여고생이 임신 23주차에야 법정대리인에게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고, 수술 과정에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낙태’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면, 청소년이 임신중지를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낙태죄’ 개정입법예고안이 이대로 통과된다면, 법정대리인의 허락을 받지 못할까 두려워 임신중지를 미루는 청소년의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개인이 처한 상황과 건강이 고려되지 않는 임신 주수 제한이라는 불합리한 처벌 기준은 정보를 얻기도 의료에 접근하기도 어렵고 임신에 대해 주변의 비난을 걱정해야만 하는 여성 청소년에게는 더욱 가혹한 악법이 될 것이다.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청소년은 임신중지를 위해 성인이 된 지인의 이름을 빌리는 등 여전히 ‘불법인 존재’로 임신중지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여성의 몸은 불법이 아니며, 우리는 처벌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환경의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써 임신중절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청소년의 임신중지에는 국가의 허락도, 법정대리인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 청소년이 임신중지를 위해 자신의 학대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시민들의 기본권인 성재생산권을 보장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정부의 ‘낙태죄’ 개정입법예고안을 지금 당장 철회하라.
둘째, 정부와 국회는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고 청소년의 임신중지권을 온전히 보장하라.


2020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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