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일상 언어 속 차별 문제 열두 번째 이야기] 우리 아이

202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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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날 기획

['우리 아이']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지겨운 레퍼토리가 한두 개가 아니지요. 그중 하나가 “우리 아이들을 위해 투표해 주세요”, “우리 아이들에게 ~한 세상을”입니다. 정작 어린이·청소년들은 투표도 할 수 없고, 지지 발언 등 의견 표시도 금지되어 있는데, 그토록 ‘우리 아이들’이 자주 불린다는 건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물론 “우리 아이를 위해” 뭔가 하라는 말은 선거 외에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영양제를 먹이세요’, ‘이런 책을 읽히세요’ 같은 광고들은 넘쳐나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를 해라’라는 버전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이런 모습은 ‘아이를 위해서’라는 게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말임을 반영한 듯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말을 강조하는 것이 어린이·청소년을 존중하고 인권과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 아이들을 위해 투표해 달라’라는 정치인들은 많지만, 그러면서 선거권이 없는 어린이·청소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아이들의 말을 듣고 투표해 달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그건 실은 선거권자인 어른이 자신이 생각하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적극 투표에 나서라는 말이지요. 이처럼 ‘우리 아이를 위해’라는 말은 정작 ‘어른’의 입장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때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차별·혐오를 선동할 때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라는 수사도 자주 쓰입니다.


‘우리 아이’를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지를 물을 필요도 있습니다. 이때의 ‘우리’는 어른들, 비청소년들이죠. 어린이·청소년들 스스로는 ‘우리 아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는 주로 ‘우리(의) 아이’이고, 이는 부모-자식이나 교사-학생의 관계 등을 연상시킵니다. 즉, ‘우리 아이들’을 부르는 것은 어린이·청소년을 어른들에게 소유되는 존재로 보는 동시에 주체가 아닌 대상의 자리에 두는 맥락을 갖곤 합니다. 또 다른 예로, 2008년 촛불집회 당시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문구의 피켓이 널리 쓰였는데요. 이때의 ‘우리들’은 어른들이겠지요. 당시 촛불집회 참가자 중 청소년들이 다수를 차지했던 상황이었는데도 저런 피켓이 등장한 건 어린이·청소년을 주체가 아닌 보호대상으로 생각하는 뿌리 깊은 습관을 보여줍니다.


무언가 행동을 촉구하며 ‘우리 아이들’을 이유로 드는 것은 비청소년들에게 사회적 책임감이나 절실함을 불러일으키나 봅니다. 하지만 그런 말은 어린이·청소년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위치시키는 태도,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를 재생산합니다. 어린이·청소년을 동등한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가족관계 등에서 비청소년에게 종속된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도 합니다.(다른 사회적 소수자의 경우에는 '우리(의) ○○' 같은 식으로 잘 쓰이지 않지요.)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캠페인은 어린이·청소년을 직접 대할 때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관점과 태도를 보여주는 언어 표현들을 돌아보려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며 어린이·청소년을 핑계 삼는 것은 좀 그만하는 게 어떨까요? 그건 어린이·청소년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일상 언어 속 차별 문제 '열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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