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청소년인권을 말하다] 부당한 일에 항의하는 게 '교권 침해'라고요? - 학생인권조례는 지켜져야 한다

20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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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일에 항의하는 게 '교권 침해'라고요?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학생인권조례는 지켜져야 한다


최보근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2010년,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 현재까지 6개 시·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서울과 충남에서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요구하는 주민발안이 진행 중이고, 다른 지역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후퇴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의 폐지·축소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다양하고 또 터무니없는 근거를 들고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강원도에서 학교를 다닌 나의 경험상 학생인권조례는 꼭 필요한 제도이다. (강원도는 소위 ‘진보 교육감’이 12년을 재임했음에도 학생인권조례가 없고, 현재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가 진행 중이다.) 특히 내가 고등학생 때 학생자치조직에서 활동하며 경험했던 일은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침해된다’라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보여준다.


너무나 일상적인 학생자치권 침해 

2021년,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나는 학생회가 설치한 ‘자치법정’이라는 기구에 관심이 있었다. 자치법정은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학교 규칙을 어기는 등 잘못을 한 학생에 대해 판단하고 조치를 취하는 제도이다. 학교마다 세세한 제도는 다를 텐데, 우리 학교의 경우 ‘자아성찰카드’라는 일종의 벌점이 쌓이면 자치법정 재판을 거쳐 봉사활동 등의 판결을 받아 자아성찰카드를 없앨 수 있었다. 진짜 법정처럼 학생들이 판사, 변호사, 검사 역할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하곤 했다. 자아성찰카드는 대체로 용의복장규정 위반이나 교사지시불이행 같은 반인권적인 이유로, 또는 교사의 주관에 따라 발부되었기 때문에, 나는 ‘변호사’ 역할을 맡아 학생들이 최대한 적은 봉사시간을 받아 자아성찰카드를 없앨 수 있게 돕고자 했다.

나는 자치법정에서 변호사로서 2건의 변호를 맡았다. 그 과정에서 검사 측이 요구한 봉사시간을 줄이기도 했고, 용의복장규정 위반이 아닌데도 잘못 발부된 자아성찰카드를 발견해내는 등 나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문제는 세 번째 사건에서 발생했다. 여느 때처럼 사건을 배정받고 자치법정에 회부된 학생에게 연락을 했는데, 그 학생이 자신은 이미 봉사활동을 했다고 답변한 것이었다. 자치법정을 맡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 당황하여 자치법정 담당인 A 교사에게 연락했다. A 교사는 "X반 애들이 너무 많아서, ○○○, ○○○는 바로 봉사활동으로 돌리려고"라며, 자신이 임의로 자치법정을 안 열기로 정했다고 했다. 

이 일에 대해 나는 크게 두 가지 문제의식이 들었다. 첫 번째, 교사 임의대로 학생자치조직의 활동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학생자치권 침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자치법정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에서 너무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두 번째, 사법부와 비슷한 형태를 띤 학생자치법정인데, 담당 교사라는 한 명의 권력자가 임의로 재판을 건너뛰고 판결해 처벌한다는 것은 마치 독재정권과 같은 비민주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학생자치도 좌우하는 교사의 재량

나는 자치법정 관계 학생들과 A 교사가 있는 단체채팅방에서 곧바로 항의했다. 다양한 지역의 학생인권조례에서는 학생자치권을 학생인권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명백한 인권침해이기도 했다.

A 교사는 곧바로 반론하며, 학생회는 학생지도부의 하위 기관이며 오히려 본인의 결정에 이렇게 항의하는 게 ‘교사의 교육권 침해’라고 했다. 자치법정 규정은 ‘공문서가 아니’라며 자치법정으로 교육할 권리는 교사의 재량권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후 확인 결과, 자치법정 규정은 학교에서 정식 절차를 거쳐 통과, 제정된 공식 문서가 맞았다.

두세 번 언쟁이 오가고 난 뒤 A 교사는 "신입부원 최보근 자격 미달로 합격 취소합니다. 재판일정 잡을 때 반영해주세요", "최보근 학생 단체 대화방 나가주세요. 오늘 밤 12시 이전까지 나가세요 불응 시 (자아)성찰카드 배부하겠습니다"라고 통보하며, 자치법정 규정상 근거가 없는 인사권을 행사하며 나를 변호사 직위에서 해임하고 협박까지 했다.

A 교사는 이후 나를 불러 자신의 정당성을 계속해서 설명했다. 자치법정은 교사인 본인이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우리 학교에서는 자치법정을 2019년 학생회 사업으로 설치하기로 하여 관련 규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A 교사는 2021년 부임해 그런 과정을 잘 알지 못하고 활동해온 것이었다.

이런 대화로는 결국 학생자치권이 침해당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나는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덕분에 학교가 떠들썩해졌지만, 민원으로는 장학사가 학교를 1회 방문한 것 외에는 아무 진전이 없었다. 민원에 대한 답변도 학교 측의 일방적 입장을 대신 전달해주는 듯한 내용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입장이라고 한다’라는 걸 전하는 데 그칠 거라면 교육청의 역할은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담당 장학사에게 직접 전화해 따져물었고, 장학사는 다시 학교에 방문하며 교감과 면담을 가졌다. 


학생인권에 대한 요구가 교권 침해? 

이후 교감은 이 일이 자치법정이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이야기하며, 당시 학생회와 자치법정부 부장 및 부원, 그리고 나를 불러모아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았고, 점점 흐지부지되는 것 같았다. 나 자신도 이 일에 너무 지치기도 했고 입시가 가까워져 그냥 그렇게 된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쯤이었다. A 교사가 나를 교권보호위원회에 회부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 이유는 ‘명예훼손’이었다. 내가 단체채팅방에 올린 글과 자신과의 면담자리에서 했던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학교에 다른 학생이 붙였던 대자보를 내가 썼다며(직접 쓰지 않았다면 영향을 주었을 거라며) 관련한 학생생활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A 교사가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했던 발언들은 문제를 비판하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는 말들이었다. 심지어 A 교사는 자신의 건장함을 과시하며, 학생들에게 체벌로 스쿼트를 시키던 남성이었다. 내가 A 교사와 면담을 했던 공간은 교사들로 가득한 학생부였다. 모든 정황을 판단해봐도 나는 그 교사에게 폭력적으로 굴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소통 중에 이런 발언이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사과하겠다고 말과 글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나는 교권보호위원회에 회부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아, 당시 담임교사와 자퇴를 상담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평소에도 그 교사에게 시달리던 다른 친구들이 함께 싸워줬던 것이다. 많은 학생이 탄원서에 서명을 해줬고, 어떤 친구는 자필탄원서를 써줬다. 나 역시도 여기에 힘을 받아 도움이 될 법한 대법원 판례를 찾아보기도 했다. 교권보호위원회 당일, 나는 부모님과 출석했고 A 교사는 출석하지 않았다. 친구들의 탄원서와 내가 찾은 대법원 판례를 제출했고, 교권보호위원회 위원들을 설득했다. 다행히도 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나의 항의는 교권침해가 아니었다고 결론이 났다. 


학생인권이 문제라는 억지 

교권보호위원회에서는 교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학교 측에선 자치법정 변호사로 복귀시켜주겠다 약속했지만, 나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변호를 맡은 적이 없고, 내가 변호를 맡아야 했던 학생이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받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 학교의 과도하다 싶은 자아성찰카드 발부 빈도가 줄어든 것도 아니었고, 이후 자치법정이 잘 이어지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경험한 이 일련의 사건에서 나는 결국 학생인권조례나 학생인권 신장이 ‘침해’한다는 ‘교권’이란 교사의 학생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력이지 않은가 생각하게 되었다. 학교 규정을 위반하거나 무시해도 처벌받는 것은 보통 학생뿐이다.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고 부당한 일에 항의해도 돌아오는 것은 교권보호위원회 회부밖에 없었다. 일부 교사들은 ‘교사의 재량권’, ‘교육권’이라는 애매모호하고 포괄적인 ‘권력’들로 학생자치권을 포함한 학생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런 권력을 견제하고, 부당한 권력 행사에 저항할 수 있게 해주는 한 줌의 힘에 불과하다. 

학생인권과 교권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거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말하는 관점에는 문제가 많다. 그런 관점을 받아들이더라도, 이미 ’교권‘을 지킬 수 있는 법제도는 많이 있다. ’교원의 지위 향상 및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특별법‘(교원지위법)이라는 법률이 존재하고, 교권보호위원회라는 구제 기구도 학교마다 있다. 하지만 학생인권은 어떤지 돌아보면, 학생인권조례 말고는 학생인권을 보호할 법제도는 존재하지 않고, 학생인권 침해를 구제할 수단도 빈약하다. 학생인권법은 여전히 제정되지 않고 있고, 학생인권 침해는 학교 현장에서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학생인권이 과도해서 교권이 침해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애초에 학생인권에 반대하는 것이거나 학교의 현실을 왜곡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전국 각지의 학생인권조례를 반드시 지켜야 하고, 학생인권은 더욱더 강화되어야만 한다.



[청소년인권을 말하다]는 지음의 활동가들이 함께 작성하며, '프레시안'을 통해 기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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