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월간참여사회] 지금의 학교폭력 담론은 청소년혐오다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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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학교폭력 담론은 청소년혐오다        

      

글 빈둥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상임활동가

최근 학생 간 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크게 성공하고 정순신 전 국가수사본부장 후보자 자녀의 학생 간 폭력 사건, 여러 유명인의 과거 학생 간 폭력 사건들이 드러나면서 학교폭력은 다시 한번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언론은 높은 수위의 학교폭력 사건을 집중 조명하면서 “학생들이 지능화·흉포화되었다”고 보도했고, 가해 학생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됐다. 시류에 편승한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학교폭력 예방 관련 조례를 제·개정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정부는 학교폭력 근절 대책을 발표했다. 가해 학생에 대한 조치사항을 기재한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의 보존 기간을 늘리고 피해 학생에 대한 분리 조치 기간을 연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폭력 담론의 구성과 실천은 청소년을 멸시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타자화하는 ‘청소년혐오’ 담론의 한 갈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의 당사자인 학생들의 삶과 목소리를 배제하고, 갈등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양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최근 한덕수 국무총리가 학교폭력의 원인을 놓고 “학생인권만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주장한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청소년과 학생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다는 고정관념은 학생을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학생이 주체적으로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규율과 질서에 대한 일탈’로 판단케 한다.

따라서, 이러한 담론은 어떤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으며 왜 이런 관점으로는 학생 간의 폭력 또는 괴롭힘 등의 현상을 근절할 수 없는지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8년 ‘학생의 날’을 앞두고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학생인권보장 등을 요구하며 퍼모먼스를 하고 있다. © 민중의소리


2018년 ‘학생의 날’을 앞두고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학생인권보장 등을 요구하며 퍼모먼스를 하고 있다. © 민중의소리

‘학생인권 강화’가 학교폭력 원인이라니

누구나 알다시피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사실 학생 간 폭력만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폭력’의 개념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오직 ‘학생 간 폭력’으로만 인식되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다른 폭력이나 구조적 불평등은 학교폭력에서 분리되었다. 학교 자체가 갖는 폭력성도 지워졌다.

동시에 학교폭력과 관련해 ‘무서운 10대’, ‘예비 범죄자’ 등의 의미가 청소년에게 부여됐다. 일부 청소년의 잘못된 행위를 집단 전체의 문제로 일반화하면서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화되었다. 이는 곧 ‘요즘 청소년들의 인성에 문제가 있어서 이런 사건이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성교육을 강조하는 사회적 흐름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학교폭력을 이렇게 규정하고 인식하면서 학생 통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이러한 언어 선택은 청소년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 및 학교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비非청소년과 사회는 학교폭력 담론을 독점하여 학생을 타자로 만들었다. 학교폭력이 개인 간의 문제이자 각각의 개별 사건으로만 다뤄지면서 폭력적인 사건을 초래한 구조나 상황은 자연스럽게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최근에만 나타나는 모습이 아니다. 2000년대 초 학생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운동이 나타났을 때도 언론들은 ‘왕따’, ‘일진회’ 등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적극적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조명했다. 2010년을 전후하여 일부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학교 체벌 금지가 시행됐을 때도 학교폭력에 초점을 맞춰 처벌을 강화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학교폭력 담론은 매번 학생인권 개선 요구의 힘을 빼는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학생들은 통제가 필요한 존재이며, 학생 간의 괴롭힘과 폭력이야말로 진짜 문제’라는 식이었다.

서열을 만들고 차별을 가르치는 학교

학생들은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그래서 학교에서 타인과 주고받는 영향이 적지 않다.

학교는 교사에게 학생들이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도록 역할을 부여하면서 학생을 통제할 권한을 준다. 이러한 통제와 규율 중심의 교육 체제는 학생들이 갈등을 해결할 때 더 쉽게 폭력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또한 교사는 학생을 더 잘 통제하기 위해서 학생들끼리 서로 감시하게 만들고 불화의 씨를 심는다. 문제가 생기면 학생들에게 연대책임을 물리고 폭력의 원인을 학생 개인에게 돌림으로써 불신의 문화를 조성한다.

게다가 입시 위주의 경쟁적 질서에서 교사가 학생들을 학업 성적으로 차별 대우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고, 이러한 인식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어릴 적부터 평가와 서열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은 또래 집단 안에서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취약해지고 쉽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기 대신 평가받고 공격당할 대상을 찾게 된다. 때로는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작은 갈등이나 차이가 집단 내 우열 평가와 서열화를 거쳐 괴롭힘이나 따돌림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학교 교육의 획일화된 체계, ‘모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개인의 다양한 사고와 행동은 무시당하고 ‘다름’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계급과 외모, 장애, 성 정체성, 인종 등에 따라 구조화된 불평등은 힘에 의한 지배를 정당화한다. 지속적·집단적인 학생 간 괴롭힘 사건의 피해자는 많은 경우 외모, 경제력, 지역, 성 정체성, 장애 등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 즉, 학교폭력 문제는 상당 부분이 혐오·차별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의 학교폭력 담론은 학생의 삶을 둘러싼 이와 같은 복잡한 상황과 구조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적 학생’만을 강조해 권력의 비대칭성과 구조적 폐해를 은폐하고 탈정치화한다.

문제는 인성도 처벌도 아니다

물론 사람들이 이렇게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게 된 배경에는 그동안 학교가 폭력·차별·괴롭힘 등을 은폐하거나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묵살해 온, 심하게는 조장해 온 역사가 있다.

그러나 학교에 대한 불신 끝에 사법적 절차와 엄벌주의를 강화한 결과 많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학생 간 폭력을 둘러싼 외부적 요인은 사라진 채 엄벌주의 정책이 끼어들면 진실은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진짜 문제를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학생 간 관계는 더욱 어긋날 가능성이 크다. 법적·행정적 절차에만 의존하다 보면 학생들이 뒤틀린 관계를 스스로 풀고 새로운 관계를 꾸려갈 기회를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제삼자의 도움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모든 다툼이 같은 수위인 것은 아니며 꼭 법과 행정 처리를 거쳐야 하는 것도 아니다. 비청소년 간 싸움에도 언제나 사법·행정적 처리 절차나 중재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우리 사회의 학교폭력 담론은 학생을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지배적 인식 체계와 결합하면서 학생을 대상화하고 소외하며 권리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왔다. ‘가해자 개인의 인성’ 또는 ‘학생의 인격적 미성숙함’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얄팍한 논의가 20여 년째 이어지지만, 정작 학교폭력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

이제는 통제와 규율 중심의 학교 문화, 사회적 차별과 경쟁의 영향, 무력화되고 대상화된 학생들의 삶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폭력을 생산하는 학교의 문제를 짚어내지 않고서는 학생 간 폭력 논의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학교 안에서 정의justice를 경험하기 어려운 학생의 삶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비로소 학교폭력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가능해진다. 우리 사회가 학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비판적·반성적으로 성찰하면서 ‘학교폭력’에 대한 렌즈를 갈아 끼워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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