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워커스 사전] 보호(保護)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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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세상에서 내는 대안 월간지 <워커스> 2023년 4월호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공현 활동가가 쓴, '보호(保護)'을 주제로 한 글입니다.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7171




[워커스 사전] 


보호(保護)


공현(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투명가방끈) 

2023.05.09

19세기, 미국에서 노예제를 옹호하던 논리 중에는 노예제가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노예 제도는 열등한 흑인들을 보호해주며 기독교적이고 선량한 주인이 노예들을 가족처럼 보살핀다면 노예들에게도 더 좋다는 것이었다. 어느 의사는 백인들이 보호하지 않으면 흑인들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개중에서 자본주의 노동 시장에서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과연 노예보다 낫냐는 반문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긴 했다. 하지만 당시 노예들의 삶을 살펴보면, 어떻게 ‘노예제는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 같은 주장을 당당하게 할 수 있었나 싶다.

그런데 사실 이런 논리 자체는 태평양 건너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그리 낯선 이야기도 아니다. 예컨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을사조약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불렸다. 열강들 틈에서 살아남을 역량이 없는 조선을, 부강해질 때까지 일본이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안에도 보호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만드는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장애인의 시설 수용 문제다. 현시점 약 3만 명에 가까운 장애인이 거주시설에 수용돼 살아간다. 장애인인권단체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도 모두 오래전부터 탈시설 정책을 요구해 왔지만, 여전히 장애인 시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사회에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장애인들을 보호하려면 시설에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애인 보호를 위해 시설에 갇혀 살게 한다는 논리와 노예 보호의 논리, 그리고 그 저변에 있는 상황은 여러모로 닮아있다.


보호하는 주체, 보호받는 대상

‘보호’는 지키고 보살피고 돕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다들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한다. 누군가가 나를 보살펴 주고 도와준다고 하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일 테다. 약자를 보호하자는 말은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윤리이다. 그럼에도 역사 속에서, 현실 속에서 보호는 쉽사리 억압의 언어로 쓰이고, 억압받는 이들은 보호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곤 한다.

먼저 보호라는 말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다층적인 의미라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다. 보호는 곧잘 직접적인 위험을 막는 것, 도움을 주는 것 이상의 의미로 쓰인다. ‘청소년 보호법’의 주요 내용은 청소년을 폭력·학대로부터 지키거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매체물을 심의해 청소년 관람불가 표지를 붙이고, 청소년이 술·담배·섹스토이 등을 구할 수 없게 하며, 술집 등에 드나들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청소년 보호법을 비롯해 “청소년 보호” 간판을 단 정책들은 대부분 청소년의 안전이나 인권 보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청소년을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건전한 청소년으로 훈육하고 선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정책은 청소년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를 자임하지만 동시에 청소년이 ‘탈선’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지시하는 장벽이 된다.

더 나아가면 보호란 단지 지배와 통제의 완곡한 표현일 뿐일 때도 있다. ‘보호국’이 ‘식민지’의 다른 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청소년의 예를 들면, 친권자가 청소년의 스마트폰 사용 기록이나 위치 정보를 추적할 수 있게 하는 앱은 명백하게 청소년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감시 프로그램임에도, 보호를 명분으로 설치되고 있다. 노예제하에서도 노예를 보호한다는 주인의 시선은 자기 노예들을 감시하는 방향으로 향했지, 외부의 위험이나 문제를 주시하지 않았다. 이렇듯 보호를 빙자해 감시와 지배가 이뤄지는 현실을 볼 때면 ‘지키려고 마음먹은 건 등 뒤에 두는 것, 시선이 향하는 쪽에는 위험해 보이는 걸 두는 것’이라는 배명훈 소설가의 글귀1가 떠오른다.

보호가 허울에만 그치는 경우도 많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보호법이라든지, 개발주의와 기후 위기를 막지 못하는 “자연환경 보호” 같은 구호들이 그런 예다. 이럴 때면 보호는 변죽만 울리며 정말 중요한 변화는 끌어내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특히 보호의 대상에게 유의미한 지위를 보장하지 않고 대상화할 때 그렇게 되기 쉽다.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에게 힘을 싣지 않으면서 내놓는 노동자 보호 조치는 얼마나 유효할 수 있는가. 인간의 삶과 별개인 듯 이야기되는 자연을 보호하자는 호소는 당장의 생존과 이익 문제 앞에서 얼마든지 후순위로 밀려난다.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보호’가 보호하는 주체와 보호받는 대상을 구분해 작동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보호는 대개 보호받는 쪽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실제론 보호하는 쪽에 보호 여부, 보호의 내용과 방식 등을 결정할 힘이 주어진다. 피보호자는 행위 및 결정의 대상에 머무르게 되고, 미성숙하고 열등하고 무력한 위치에 붙들린다. 따라서 보호자는 피보호자를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도 있고, 자의적으로 보호를 줄이거나 보호하는 시늉에만 그칠 수도 있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표출될 때 자주 동반되는 논리가 추가적인 ‘보호’나 ‘배려’를 받는 어린이·여성·장애인과 같은 이들이 특혜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사실 보호를 통해 존재의 의미와 힘을 얻는 대상은 주로 보호하는 쪽이다. 어린이·청소년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호받을 권리’가 중요한 권리로 천명되더라도 실제로는 보호가 피보호자의 권리로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이유다.


피보호자 없는 보호

성숙하고 우월하고 이성적인 보호자와 미성숙하고 열등한 피보호자의 구도는 근대 계몽주의에서부터 이어져 온 지배의 공식이다. 여성 억압도, 장애인 억압도, 식민 지배도, 인종주의도 이러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보호의 “보(保)”가 아이를 돌보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글자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돌봄에 관한 논의와도 긴밀하게 결부돼 있다. 이 지배의 공식 속에서는 돌봄이 필요 없는 독립적 인간만이 자유로운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전제된다. 돌봄 받아야 하고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 피보호자들은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돌보는 일도 돌봄 받는 일도 특정 집단만의 것이 아니며, 인간 모두가 취약성을 가지기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으로 돌봄을 필요로 한다. 보호도 마찬가지다. 가령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은 안전을 위해 국가의 법과 치안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어쩌면 재산과 법적 권한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일수록 더욱더 이런 질서에 기댈 것이다. 일터에서는 위험한 작업과 착취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고, 질병과 사고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런 ‘보호받을 권리’ 들은 ‘안전할 권리’, ‘건강할 권리’, ‘의료권’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보호는 특정한 소수자들만의 것이고, 소수자들이란 곧 보호받아야만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존 보호 개념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보호를 거부한다거나 더 강한 보호를 요구하는 것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보호하는 쪽과 보호받는 쪽으로 존재를 구분하고 자리를 고착화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그러고 나서 보호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임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하는 관계와 여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여성과 어린이에게 밤길이 위험하다고 야간 통행금지를 적용할 게 아니라, 밤길이 위험하지 않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며 좋은 삶을 지속해 가야 하는 것이다.

더 약한 존재를 보호하자는 말조차 거부당하는 각자도생과 혐오의 시대에 보호를 극복하자는 제안은 한층 더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가 노예 해방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보호하고 그럼으로써 지배하는 관계가 계속돼 왔기에 차별과 혐오도 계속되고 심화됐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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