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 활동을 하다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어요. “근데 진짜 청소년들은 그렇게 생각해?”, “그건 활동하는 애들이나 그런 거지, 보통 애들은 안 그렇지 않아?” 이 말은 참 여러 번, 다양한 자리에서 들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청소년이었을 때에도요. 제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근데 네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해?”라는 질문이 따라왔어요. 그때마다 ‘내가 청소년인데, 내가 하는 이야기는 청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걸까?’ 싶었죠.
사실 ‘진짜 청소년’이라는 말은 꽤 무겁게 느껴집니다. 모든 청소년이 같은 생각을 해야 ‘진짜’가 되는 걸까요? 누구의 말이 더 평균값에 가까운지를 따져야 ‘대표성’이 생기는 걸까요?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원래 다르고, 그 다름 속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의 의견’이라는 것도 늘 바뀌고, 갈리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요? 세상의 풍경이 달라지면 우리가 느끼는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달라지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특별한 청소년의 의견’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듣고 싶은 말’을 해줘야만 귀 기울일 수 있는 것처럼요.
예를 들면, 핸드폰 압수나 소지 금지 같은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그래요. 청소년인권의 관점에서 “이건 권리의 문제다”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근데 청소년들 스스로도 핸드폰 제출하고 싶어하잖아”라고 말하곤 해요. 그 말은 마치, 청소년 스스로 조절이 안 되니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그보다 ‘이 말이 불편하다’는 감정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청소년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으면서, 인권의 언어를 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저는 이제 청소년인 기간을 지난 사람이지만, 그때의 저도, 지금의 청소년들도, 자신의 삶과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믿습니다. 어떤 청소년(혹은 누구나)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청소년은 아직 말을 찾지 못했거나,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체가 청소년들, 모두의 삶이고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계속 묻고 싶어요. ‘진짜’라는 말 뒤에 감춰진 기대는 무엇인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건지. 우리가 더 많이 들어야 할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지를요.
🔸 질문이 많은선'이라는 제목은 '질문이 많은', '은선'을 더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질문을 통해 활동을 만났고,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방법을 활동으로 찾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계속 질문을 떠올리고 싶어요. 은선의 [활동가의 편지]에서는 앞으로 이런 질문들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활동가의 편지💌] 질문이 많은선
- “진짜 청소년의 이야기가 있을까?”
🔸 질문이 많은선'이라는 제목은 '질문이 많은', '은선'을 더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질문을 통해 활동을 만났고,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방법을 활동으로 찾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계속 질문을 떠올리고 싶어요. 은선의 [활동가의 편지]에서는 앞으로 이런 질문들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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