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학부모신문] 성평등 도서 폐기 논란, 금기와 검열이 아닌 권리로!

202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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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평등 도서 폐기 논란, 금기와 검열이 아닌 권리로!

- 이은선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성관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다름 아닌 컴퓨터실에서였다. 앞 좌석에 앉은 친구들이 야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걸 통해 처음으로 성과 관련된 내용을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경로로 접한 내용들은 성을 왜곡되게, 여성에게 억압적인 시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성과 관련된 내용을 볼수록 나에게 남는 것은 혼란스러움과 불편감뿐이었다. 내 몸과 삶의 일부에 대한 정보이지만, 성은 나에게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금기와 부끄러움으로 여겨졌다.

이전에 학교에서 몇 차례 성교육을 받아 봤지만, 주어진 정보는 너무나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다. 학교 성교육은 성에 대해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구체적인 정보는 물론 성적 자기 결정권에 대한 논의조차 없었다. 성을 금기시하거나 여성의 몸을 보호해야 한다는 식으로 성차별 관점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접근할 수 있었던 성과 관련된 내용을 다룬 유일한 책은 ‘Why?’ 시리즈 중 하나인 『Why? 사춘기와 성』(전지은, 예림당)이었다. 하지만 이 책조차 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성별 간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여성의 생리 변화와 임신에만 국한된 내용을 다루었다. 이는 오히려 성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성평등의 가치를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개인 경험 속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성교육과 성평등 도서에 대한 검열 논란은 더욱 큰 문제로 다가온다.

예를 들어 충청남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어느 단체는 “조기 성애화를 정당화하는 도서는 폐기 처분되어야 한다”며 성교육과 성평등 도서를 폐기하라는 민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평등과 다양성을 가르쳐야 할 교육의 본질을 왜곡하며, 이를 통해 특정 도서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성 교육·성 평등 도서 검열은 단순히 책 몇 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성평등 교육과 성적 자기 결정권, 그리고 어린이·청소년이 누려야 할 알 권리와 교육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검열을 통해 특정 주제나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그 주제는 불편하거나 위험한 것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 또한, 성소수자나 다양한 가족 형태를 다룬 책이 검열되면, 이러한 존재를 비정상적이거나 금기시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 편견이 강화된다.

최근 KBS <시사기획 창> ‘청소년 성교육 끝장 토론회’에서는 한 토론자가 “학교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교육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이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마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보여줄지 결정하는 것이 부모의 전유물인 듯한 관점을 드러낸 발언이다. 그러나 이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권리를 간과한 발언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단순히 가르치는 대상으로만 보는 것은 부당하다.

유엔 아동권리 협약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다양한 정보에 접근할 권리, 특히 복지와 건강을 위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유엔 아동권리 위원회는 2019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제5~6차 국가 보고서에 대한 최종 견해> ‘주된 우려사항 및 권고사항’에서, 학교 성교육에서 성소수자를 다루지 않는 문제를 지적하며 “성적 지향(sex lua orientation) 및 성 정체성을 적절히 포괄하여 각 연령에 적합한 성교육을 제공할 것”(18쪽)을 권고했다.


더 이상 성을 둘러싼 금기와 편견이 어린이와 청소년의 권리를 가로막는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성평등과 다양성의 가치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권리로서 교육과 알 권리를 확대하는 것이, 더 평등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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