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학부모신문] '노 키즈 존'의 대안은 '예스 키즈 존'이 아니다

202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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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키즈 존의 대안은

예스 키즈 존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 키즈 존이 여러 측면에서 비판을 받자, 몇 년 전부터 노 키즈 존의 대안마냥 ‘노 배드 패런츠 존(No bad parents zone)’을 내건 영업장들이 등장하였다. 매장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어린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나쁜 부모’의 출입을 제한한다는 뜻이다. 2020년 〈대구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부모님 주의 존’을 내건 곳도 있다. 경남 양산 한 카페는 출입문에 ‘여기는 노 키즈 존이 아닌 부모님 주의 존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큰 동영상 소리, 장난, 뛰기, 유모차로 매장 내 배회들을 하면 직원이 제지하거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주의가 필요하고 이런 부분은 위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행동을 하면 언제든 쫓아낼 수 있다는 경고가 폭력으로 느껴졌다. 존재 자체를 거부하며 입장하지 말라고 써 붙이며 누군가를 배제하고 쫓아내는 것이 어쩌다 이렇게 쉬운 선택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예스 키즈 존’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2022년 서울시는 ‘서울 키즈 오케이 존’ 사업을 시작했다. 이에 참여한 한국 맥도날드는 2023년 “온 세상 어린이 대환영”이라는 문구와 함께 ‘예스 키즈 존’ 마케팅을 전개했다. 그러나 키즈 오케이 존이나 예스 키즈 존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어린이는 배제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여기는 아이를 데리고 와도 됩니다”는 문장은 “다른 곳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말처럼, 어린이의 존재도 어른의 ‘예스’라는 허락 아래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들린다. 이는 어린이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시혜적 배려에 머무르는 태도이다. 

예스 키즈 존은 노 키즈 존에 대항하여 등장한 긍정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여전히 ‘어린이의 공간 이용 제한’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상황이 있다. 중요한 것은 예스 키즈 존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노 키즈 존이 있어선 안 될 차별 행위라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것, 그리고 모든 장소가 기본적으로 예스 키즈 존이 되는 것이다.

2019년, 어린이 작가 전이수는 동생의 생일을 맞아 가족과 함께 한 레스토랑에서 겪은 출입 거부 경험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다. 식당 입구에서 “여기는 노 키즈 존이야. 애들은 여기 못 들어와”라는 말을 들은 그는 그날 느낀 슬픔과 혼란을 차분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이 일기는 “왜 개와 유대인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어요?”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어린이에 대한 차별이 단지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며, 그 대상 존재를 달리해왔을 뿐, 차별과 억압이 역사적으로 이어져왔다는 걸 떠올리게 만든다. 노 키즈 존은 단지 ‘출입, 이용 금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린이가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구조이자, 존재를 지워나가는 방식이다. 전이수 작가는 “어른들이 편히 있고 싶어 하는 그 권리보다 아이들이 가게에 들어올 수 있는 권리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7년 노 키즈 존이 아동에 대한 명백한 나이 차별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시정하라는 권고를 내린 바 있다. 2019년 한국 정부에 대한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심의에서도 한국의 어린이·청소년 인권 실태와 이를 통해 주요하게 짚어야 할 쟁점으로 노 키즈 존 문제를 포함시켰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배제하는 데 익숙하다. 왜 어린이는 공간의 중심에 설 수 없으며, 왜 늘 ‘허락’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가? 어린이를 공간에서 배제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에서는 어린이의 권리에 대한 인식도 낮아지며, 이는 곧 이들의 시민 주체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는, 어린이를 ‘특별히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라 ‘당연히 함께하는 존재’로 여기는 사회이다. 그것이야말로 차별 없는 공동체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작성 : 이은선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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