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지음][학부모신문] 청소년들의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2024-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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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민주화운동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몇 년 전, <1991년 열사 투쟁 3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 1991년 열사 투쟁과 한국 민주주의>에 ‘청소년운동 입장에서 본 1991년’이라는 주제로 토론에 참여했다. 1991년은 1987년 민주화운동만큼 뜨거웠지만 제대로 기억되지도, 사회적으로 조명받지도 못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면 1987년을 떠올린다. 하지만 1987년 이후에도 투쟁이 이어졌으며 그 중 한 축으로 ‘고등학생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운동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있었던 청소년들의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1988 ~ 1989년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여러 중고교에서 학생 자치권을 쟁취했다. 1989년 전교조 창립과 해직 사태를 맞이하여선 더욱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이후에는 교육 개혁 요구와 함께 두발 규제와 보충수업 철폐 등 학생인권과 학교 민주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통일이나 노동해방처럼 사회 변혁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올해 6월에는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들이 함께 <청소년 인권과 민주주의의 만남 - 민주화 운동 역사 여행>을 다녀왔다. 고등학생 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돌아보며 지금 청소년인권운동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시대와 상관없이 보편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과거 투쟁의 역사를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다. 

여행 첫째 날,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 중 한 곳이었던 광주 5·18 묘역을 방문했다. 그 중에서도 1991년 6월에 사망한 김철수 열사를 빼놓을 수 없다. 김철수 열사 묘비 옆 면에는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열사가 남긴 유서에서 가져온 문구이다. 오래 전 외침이었지만 바로 지금 청소년 인권 활동가가 한 말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김철수 열사의 비석 앞에서 왜 이런 열사들의 존재를 이전에는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 김수경, 심광보 열사와 김철수 열사를 고등학생운동의 열사로 꼽는다. 특히 김철수 열사는 1991년 강경대 열사가 경찰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으로 일어난 투쟁 속에서 분신한 이들 중 하나다. 

전남 보성고 학생이었던 김철수 열사는 1991년 유일한 ‘고등학생 열사’이다. 그런데 죽음 당시에 고등학생은 아니었으나 고등학생운동 출신 열사들은 더 있다. 1991년 투쟁 초기 대학생 열사인 전남대 박승희(4월 29일 분신), 안동대 김영균(5월 1일 분신), 경원대 천세용(5월 3일 분신) 열사 모두 고등학생운동 참여자였다. 이는 당시 분신으로 항거했던 학생 열사 모두 고등학생운동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1991년의 투쟁은 물론 고등학생 열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잘 조명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고등학생운동이 밑바탕에 있었다는 바로 그 점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 아닐까. 고등학생운동의 경험도, 청소년들이 정치적 주제로 나서서 내세운 이야기도, 교육과 사회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과 변혁에 대한 열망도 모두 한국 사회에서는 승인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청소년 열사들의 약력을 설명하는 데 ‘성적 우수’나 ‘명문고’ 같은 표현이 쓰이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목숨을 내놓으며 입시경쟁과 차별, 폭력에 찌든 교육을 고발한 이들의 투쟁이 갖는 의미를, 시험 성적들로 뒷받침하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비판하려 한 문제점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열사를 소개하는 내용에서 성적을 강조하는 문구를 삭제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1991년, 김철수 열사가 외친 ‘로보트 교육’에 대한 거부, 인간적인 교육과 사회를 바랐던 외침을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갔고 투쟁했던 청소년운동으로 바라보며 제대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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