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로 손을 꽉 쥐어보는 감각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발에 힘이 있다는 것이 좀 더 와닿았다. 눈을 감고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눈을 감을 수록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균형을 놓칠까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이라는 매개가 있을 때 좀 더 자유로워지는 몸을 감각하기도 했다. 나의 몸을 함부로 만지고 때렸던 순간의 경험들이 나에게 꼭 필요한 환대와 다정한 접촉들을 가로막게 한다. 타인과 몸을 접촉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감각할 때 조금은 허물어지고 울 것만 같다.
● 정말 힘들었을 때, 내 두 어깨로 모든걸 감당해야만 했을 때, 항상 몸을 털고 한숨을 쉬고 땀 흘리며 스텝을 밟았을 때, 그리고 친구들과 그 시간을 함께 보냈을 때 지금처럼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학교에서 조그만 실수도 그들에게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계속 몸을 굳게 한다. 다만 학생들과 포옹하고, 운동하고, 동료와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나를 버티게 한다. 같이 땀 흘리고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길 바란다.
● 태어나서 이렇게 오래 발을 만져본 건 처음이었다. 내 발보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을 더 많이 봤다는 것을 깨달음. 공은 영감일 뿐 잡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진짜 충격적이었다. 정답이 있는 교육, 통제에 따라야 하는 학교, 입시경쟁교육을 반대한다고 자주 이야기 했지만 그것을 몸의 움직임과 연결시키진 못했다. 학교의 체육수업도 모두 다 정답이 있고, 입시경쟁교육이었다. 그 반대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함께 읽은 글에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하루 4번, 성장하기 위해 하루 12번의 포옹이 필요하다는 말은 “돌봄"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자라는 시기의 사람은 많은 포옹이 필요하다. 식사 후 트림도, 이동도 안겨서 하니까. 하지만 포옹은 함께 안는 쌍방향의 행위. 베푸는 돌봄이 아닌 상호돌봄에 대한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감각, 감정, 느낌에 대해 깨닫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내가 내 감정을 계속 지나치고 억누르면 결국 감정을 아예 못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마음, 느낌, 생각을 있는 그대로 몸짓이나 말 등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움. 그런데 체벌은 폭력, 권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했던 것 같다. 동시에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내 느낌은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나’다움을 제한하는 것은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체벌에 맞서고, 체제에 맞서는 일은 결국 내 몸의 감각을 내 마음과 동등히 위치시켜, 감각까지 억눌러지지 않도록 오늘 우리가 한 것처럼 해방시키는 거 아닐까?
●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게 아니면 몸을 가만히 두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학교 다닐 때나 어릴 때 가만히 있지 않으면 혼내던 비청소년(양육자, 교사)들이 생각났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복장을 제대로 갖추기 않는 것이라 여기는데, 더러워진 발도 더러워진 손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던 게임들은 항상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었는데(게임을 이기려고 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 같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놀이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진 사람들을 맞거나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받는 게 당연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체화되어서 자꾸 ‘상대의 날개뼈에 더 닿아 봐야지', ‘더 다양하게 젠가 블럭을 잡아 봐야지'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중간에 젠가를 하다가 ‘젠가가 가까이 있어도 문제 없는데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생각하게 됐다.
● 나는 수영하는 법, 몸에 힘을 풀고 물에 뜨는 법을 몰라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순간이 있다. 그 두려움에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물에서보다 땅을 딛고 살아가며 죽을 뻔한 순간, 죽고 싶었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왜 잘 딛고 서기 위해, 땅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상처로 뭉쳐진 나의 마음을 몸의 언어를 통해 다시금 돌봄 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 워크샵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몸을 구성하는 것 중 액체의 비율이 크다는 점이다.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닌데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서 다가오는 느낌이 낯설었다. 요즘은 무릎, 왼쪽 무릎이 계속 아프다. 한 자세를 유지하고 비대칭의 책상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를 바로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워크샵을 하면서 예전에 했던 복싱 동작을 오랜만에 해 봤는데, 그런 동작은 ‘자세'와는 달리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모래놀이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타인의 리듬이 끼어드는 것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강제한다는 것은 한가지를 강요할 뿐 아니라, 순간마다 변하는 그 모든 움직임을 모른 척하고 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 손을 열 때는 서로 인사하는 느낌. 열어주면서 모르는 타인과도 가까워지는 기분. 닿는 손길이 불편하다가도 편해지는 시점이 찾아온 다음 따뜻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마음이 풀리는 변화. 꼭 접촉 때문 만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팔을 서로 꽉 짜줄 때는 (아마도 체벌이 키워드였던 만큼 더?) 손목이나 팔뚝을 붙잡혔던 기억이 다시 찾아왔고, 내 몸을 다시금 감각하는 신선함보다는 불편한 느낌이 부각되면서 나머지 시간은 쉬기로. 그래도 감각의 문제가 서로 환대한다는 자각을 크게 방해하진 않았고, 얼마나 어떤 기억이 오래 영향을 끼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 발과 깍지를 끼고 잔뜩 고통을 느낀 뒤, 처음으로 걸었을 때 뭔가 시원하고 부드럽고 안정적인 느낌이 나서 신기했다. 최근에는 어디에, 누구와 있어도 몸과 마음이 편치 못했다. 생각을 줄이는 약, 불안하지 않은 약, 잠이 오는 약들을 먹어도 생각과 불안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을 신기한 경험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생고통…을 느낄 뿐인 것 같은데도 마음이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굳은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 왠지 오늘은 잠에 편히 들 것만 같다.
● 동작을 할 때 마다 몸이 편해졌습니다. 이 활동을 하기 전까지 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난 후 나의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며 생활했고, 그 긴장감이 몸에 베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나를 해치는 아픔도 있지만, 회복하는 아픔이 있어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조금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매일을 긴장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 온 몸의 근육은 다 딱딱하게 뭉쳐있다. 낯설고, 아프고, 어렵게 느껴지면 나는 근육에 힘을 주고 그저 가만히 있는다. 나도 모르게 신체가 지쳐간다. 그러다가도 긴장이 풀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 때 쯤이면 내 폐에서 공기를 느끼고, 근육도 숨을 쉬고, 마음이 편해진다. 그제서야 난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굳어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아픔도 잊고 편안함도 잊어왔다.
● 손바닥 접촉을 했을 때 처음엔 아팠다. 왼손과 오른손의 느낌이 다르게 감각되었는데 초등학교 때 손바닥을 막대기로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 뒤로 어떤 부분이 계속 아픈 것 같다. 평소에 늘 아프지는 않지만 반죽하듯 만져졌을 때 잠시 잊혔던 통증이 떠오른 것 같다. 흔들리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또 넘어질까봐 긴장되기도 했다. 공이 움직일 때, 사실 공이 무서웠다. 무서운 것은 움츠러들게 한다. 그래도 나중엔 점점 흥겨웠다. 공 놀이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지속하기 위해 나의 리듬과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 발바닥을 누르면서 자주 다치던 발목-발등 부분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몸에 쌓여있을 상처와 피로의 퇴적층을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맞은 게 발바닥, 손바닥이었던 것 같은데, 몸을 단단히 경직되게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다.(너무 많이 맞은 듯…) 돌리는 공 사이에 리듬을 맞춰 하는 활동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긴장되고 어렵게 느껴졌다. 약간은 게임 같지만, 뭔가 재빠르게 성공해내야 한다는, 해법을 익혀야 한다는 습관이 스스로 느껴졌다.
● 내 몸을 마음대로 치고, 꼬집고, 건들고, 누르고, 찌르고, 발가벗으라고 했던 교사들과 어른들이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몸들에게 사과한다면, 우리는 다르게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 바닥이 딱딱하다. 앉으면 엉덩이가 아프다. 그렇다고 쪼그려 앉으면 다리가 아프다. 청소를 하고 물티슈로 닦았는데도 바닥이 더럽다. 발보다 손이 더럽다는데 맨발에 쓰레기가 붙어서 발이 더 더러워졌다. 처음에는 추웠는데 나중엔 몸을 움직이니 더러워졌다. 공에 많이 맞았다. 초반에는 몸이 아픈 행위들이 많았다. 왜 몸만 움직이다가 이 시간이 끝났을까? 배가 고프다. 끝나면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저녁을 공짜로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시장감이 깊어진다. 5월 5일이 마르크스 생일이라는데 오늘의 행위가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오늘은 내 몸을 혹사했다. 내 몸은 강사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 열등감이 느껴진다. 배가 더 고파진다. 8분 동안 글을 써야 한다는 게 힘들다. 글씨도 이상하다. 하지만 이런 글을 적어도 혼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
지난 5월 5일, 지음에서는 ‘학교 체벌 생존자 위로회’를 진행했습니다. ‘변화의 월담’과 함께 바디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몸에 기억되어있던 체벌의 경험을 재발견하거나, 떨치거나, 나누었습니다.
경상권, 전라권, 수도권 등 전국에서 신청해 주셨고, 총 19명이 참여했습니다.
2023년 지음에서 “체벌은 국가폭력이다 - 국가가 조장한 체벌, 국가에 사과받자”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체벌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 해소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학교 체벌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문제에 더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올해 어린이날을 맞아, 어리고 어렸던 우리들의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체벌을 겪었던, 겪고 있는 분들을 만나 함께 위로하고 분노하자는 취지를 담아 이번 위로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비를 뚫고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 공간을 흔쾌히 내어주신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십시일반 모금에 동참해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아래는 참여해 주신 분들이 직접 적은 소감을 나눕니다.
● 발로 손을 꽉 쥐어보는 감각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발에 힘이 있다는 것이 좀 더 와닿았다. 눈을 감고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눈을 감을 수록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균형을 놓칠까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이라는 매개가 있을 때 좀 더 자유로워지는 몸을 감각하기도 했다. 나의 몸을 함부로 만지고 때렸던 순간의 경험들이 나에게 꼭 필요한 환대와 다정한 접촉들을 가로막게 한다. 타인과 몸을 접촉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감각할 때 조금은 허물어지고 울 것만 같다.
● 정말 힘들었을 때, 내 두 어깨로 모든걸 감당해야만 했을 때, 항상 몸을 털고 한숨을 쉬고 땀 흘리며 스텝을 밟았을 때, 그리고 친구들과 그 시간을 함께 보냈을 때 지금처럼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학교에서 조그만 실수도 그들에게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계속 몸을 굳게 한다. 다만 학생들과 포옹하고, 운동하고, 동료와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나를 버티게 한다. 같이 땀 흘리고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길 바란다.
● 태어나서 이렇게 오래 발을 만져본 건 처음이었다. 내 발보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을 더 많이 봤다는 것을 깨달음. 공은 영감일 뿐 잡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진짜 충격적이었다. 정답이 있는 교육, 통제에 따라야 하는 학교, 입시경쟁교육을 반대한다고 자주 이야기 했지만 그것을 몸의 움직임과 연결시키진 못했다. 학교의 체육수업도 모두 다 정답이 있고, 입시경쟁교육이었다. 그 반대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함께 읽은 글에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하루 4번, 성장하기 위해 하루 12번의 포옹이 필요하다는 말은 “돌봄"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자라는 시기의 사람은 많은 포옹이 필요하다. 식사 후 트림도, 이동도 안겨서 하니까. 하지만 포옹은 함께 안는 쌍방향의 행위. 베푸는 돌봄이 아닌 상호돌봄에 대한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감각, 감정, 느낌에 대해 깨닫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내가 내 감정을 계속 지나치고 억누르면 결국 감정을 아예 못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마음, 느낌, 생각을 있는 그대로 몸짓이나 말 등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움. 그런데 체벌은 폭력, 권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했던 것 같다. 동시에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내 느낌은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나’다움을 제한하는 것은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체벌에 맞서고, 체제에 맞서는 일은 결국 내 몸의 감각을 내 마음과 동등히 위치시켜, 감각까지 억눌러지지 않도록 오늘 우리가 한 것처럼 해방시키는 거 아닐까?
●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게 아니면 몸을 가만히 두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학교 다닐 때나 어릴 때 가만히 있지 않으면 혼내던 비청소년(양육자, 교사)들이 생각났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복장을 제대로 갖추기 않는 것이라 여기는데, 더러워진 발도 더러워진 손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던 게임들은 항상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었는데(게임을 이기려고 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 같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놀이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진 사람들을 맞거나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받는 게 당연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체화되어서 자꾸 ‘상대의 날개뼈에 더 닿아 봐야지', ‘더 다양하게 젠가 블럭을 잡아 봐야지'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중간에 젠가를 하다가 ‘젠가가 가까이 있어도 문제 없는데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생각하게 됐다.
● 나는 수영하는 법, 몸에 힘을 풀고 물에 뜨는 법을 몰라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순간이 있다. 그 두려움에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물에서보다 땅을 딛고 살아가며 죽을 뻔한 순간, 죽고 싶었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왜 잘 딛고 서기 위해, 땅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상처로 뭉쳐진 나의 마음을 몸의 언어를 통해 다시금 돌봄 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 워크샵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몸을 구성하는 것 중 액체의 비율이 크다는 점이다.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닌데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서 다가오는 느낌이 낯설었다. 요즘은 무릎, 왼쪽 무릎이 계속 아프다. 한 자세를 유지하고 비대칭의 책상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를 바로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워크샵을 하면서 예전에 했던 복싱 동작을 오랜만에 해 봤는데, 그런 동작은 ‘자세'와는 달리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모래놀이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타인의 리듬이 끼어드는 것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강제한다는 것은 한가지를 강요할 뿐 아니라, 순간마다 변하는 그 모든 움직임을 모른 척하고 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 손을 열 때는 서로 인사하는 느낌. 열어주면서 모르는 타인과도 가까워지는 기분. 닿는 손길이 불편하다가도 편해지는 시점이 찾아온 다음 따뜻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마음이 풀리는 변화. 꼭 접촉 때문 만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팔을 서로 꽉 짜줄 때는 (아마도 체벌이 키워드였던 만큼 더?) 손목이나 팔뚝을 붙잡혔던 기억이 다시 찾아왔고, 내 몸을 다시금 감각하는 신선함보다는 불편한 느낌이 부각되면서 나머지 시간은 쉬기로. 그래도 감각의 문제가 서로 환대한다는 자각을 크게 방해하진 않았고, 얼마나 어떤 기억이 오래 영향을 끼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 발과 깍지를 끼고 잔뜩 고통을 느낀 뒤, 처음으로 걸었을 때 뭔가 시원하고 부드럽고 안정적인 느낌이 나서 신기했다. 최근에는 어디에, 누구와 있어도 몸과 마음이 편치 못했다. 생각을 줄이는 약, 불안하지 않은 약, 잠이 오는 약들을 먹어도 생각과 불안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을 신기한 경험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생고통…을 느낄 뿐인 것 같은데도 마음이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굳은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 왠지 오늘은 잠에 편히 들 것만 같다.
● 동작을 할 때 마다 몸이 편해졌습니다. 이 활동을 하기 전까지 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난 후 나의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며 생활했고, 그 긴장감이 몸에 베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나를 해치는 아픔도 있지만, 회복하는 아픔이 있어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조금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매일을 긴장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 온 몸의 근육은 다 딱딱하게 뭉쳐있다. 낯설고, 아프고, 어렵게 느껴지면 나는 근육에 힘을 주고 그저 가만히 있는다. 나도 모르게 신체가 지쳐간다. 그러다가도 긴장이 풀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 때 쯤이면 내 폐에서 공기를 느끼고, 근육도 숨을 쉬고, 마음이 편해진다. 그제서야 난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굳어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아픔도 잊고 편안함도 잊어왔다.
● 손바닥 접촉을 했을 때 처음엔 아팠다. 왼손과 오른손의 느낌이 다르게 감각되었는데 초등학교 때 손바닥을 막대기로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 뒤로 어떤 부분이 계속 아픈 것 같다. 평소에 늘 아프지는 않지만 반죽하듯 만져졌을 때 잠시 잊혔던 통증이 떠오른 것 같다. 흔들리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또 넘어질까봐 긴장되기도 했다. 공이 움직일 때, 사실 공이 무서웠다. 무서운 것은 움츠러들게 한다. 그래도 나중엔 점점 흥겨웠다. 공 놀이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지속하기 위해 나의 리듬과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 발바닥을 누르면서 자주 다치던 발목-발등 부분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몸에 쌓여있을 상처와 피로의 퇴적층을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맞은 게 발바닥, 손바닥이었던 것 같은데, 몸을 단단히 경직되게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다.(너무 많이 맞은 듯…) 돌리는 공 사이에 리듬을 맞춰 하는 활동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긴장되고 어렵게 느껴졌다. 약간은 게임 같지만, 뭔가 재빠르게 성공해내야 한다는, 해법을 익혀야 한다는 습관이 스스로 느껴졌다.
● 내 몸을 마음대로 치고, 꼬집고, 건들고, 누르고, 찌르고, 발가벗으라고 했던 교사들과 어른들이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몸들에게 사과한다면, 우리는 다르게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 바닥이 딱딱하다. 앉으면 엉덩이가 아프다. 그렇다고 쪼그려 앉으면 다리가 아프다. 청소를 하고 물티슈로 닦았는데도 바닥이 더럽다. 발보다 손이 더럽다는데 맨발에 쓰레기가 붙어서 발이 더 더러워졌다. 처음에는 추웠는데 나중엔 몸을 움직이니 더러워졌다. 공에 많이 맞았다. 초반에는 몸이 아픈 행위들이 많았다. 왜 몸만 움직이다가 이 시간이 끝났을까? 배가 고프다. 끝나면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저녁을 공짜로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시장감이 깊어진다. 5월 5일이 마르크스 생일이라는데 오늘의 행위가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오늘은 내 몸을 혹사했다. 내 몸은 강사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 열등감이 느껴진다. 배가 더 고파진다. 8분 동안 글을 써야 한다는 게 힘들다. 글씨도 이상하다. 하지만 이런 글을 적어도 혼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모금결과와 사용 내역은 다음 주 중에 정리해서 따로 공개 예정입니다. 다시 한 번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