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언어 속 차별 문제 열한 번째 이야기] 미래의 주역, 미래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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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칡2023-05-15 11:10
아동과 청소년들의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아동과 청소년들의 미래'만'을 생각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잘 쓰인 글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사회 전체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청소년이 자신이 당한 인권 침해나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면 다 누릴 수 있다, 참아라"라는 식으로 대응해 왔나요? 그들은 언제나 '나중에'라고 외치며 지금의 권리를 미래의 일로 유예해왔지요. 마치 청소년 시절은 그저 성년 시절을 위한 준비 기간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듯이.
한편으로 나이 먹은 어른을 고쳐쓰기 어렵다는 말은 그 자체로 성년들에게 차별적인 말이기도 하네요. 성년은 머리가 굳어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인가요? 왜 성년의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람됩니다만, 사실 그 말의 기저에는 "성년 기득권을 가진 나는 변하기 싫고, 변할 유인도 없으니 꼬우면 힘없는 청소년 너희들이 생각을 바꿔라"라는 생각이 숨어있지는 않나요?
한편으로 나이 먹은 어른을 고쳐쓰기 어렵다는 말은 그 자체로 성년들에게 차별적인 말이기도 하네요. 성년은 머리가 굳어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사람들인가요? 왜 성년의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외람됩니다만, 사실 그 말의 기저에는 "성년 기득권을 가진 나는 변하기 싫고, 변할 유인도 없으니 꼬우면 힘없는 청소년 너희들이 생각을 바꿔라"라는 생각이 숨어있지는 않나요?
🌵 어린이날 기획
[미래의 주역, 미래의 희망]
어린이날 노래 가사엔 이런 구절이 있어요. “우리가 자라면 나라의 일꾼”. 또 이런 말들도 흔히 들을 수 있죠.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 “청소년은 우리나라 미래의 주역(주인공)”. 이런 문장에 어느 정도 공감하시나요? 우리 사회에는 워낙 어린이·청소년을 무시하고 하대하거나 혐오하는 표현이 많기 때문에 희망과 주역이라는 말은 얼핏 보면 긍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또 이런 말은 어린이·청소년이 소중한 존재이며 우리 사회가 어린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을 제공하고 보호해야 하는 이유로 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과 ‘미래의 주역’이라는 말은 어린이·청소년이 ‘미래의 존재’라는 이야기와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 존중받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미래’ 취급을 당하는 거지요. 이는 어린 시절은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시기라는 인식과도 연결됩니다. 많은 분들이 학교에서 이런 말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텐데요. “지금 흘리는 침은 내일 흘릴 눈물이다”, “지금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으면 미래의 ~가 바뀐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내일을 위해 오늘의 고통은 참아야 하며, 부당한 일을 겪거나 괴롭더라도 미래를 위한 것이라면 지금은 견디기를 강요받곤 합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서"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그전까지는 참고 기다리라는 요구도 받곤 합니다. ‘미래의 희망’이라는 말의 뒷면에는 어린이·청소년에게 현재의 고통을 참으라는 말, 현재의 삶은 덜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왜 어린이·청소년은 오늘을 살기보다 나중에 올 미래를 대비해야 할까요? 우리는 나이를 더 먹어야 주인공이 되어 제대로 살 수 있는 걸까요? 그 이전까지의 삶은 ‘진짜 삶’이 아닌 걸까요? 사실 이런 현상은 어린이·청소년 시기에만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는 마치 특정 나이가 되면 어때야 한다는 걸 정해두고 그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현재의 삶보다 미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오늘을 살 권리’가 필요합니다. 어린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어린이·청소년도 ‘지금,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미래의 희망’, ‘미래의 주역’이라는 말은 어린이·청소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사실 어린이·청소년의 현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어린이·청소년이 미래의 희망이기에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어린이·청소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어린이·청소년이 현재의 모습 자체로 고유하고 존엄한 사람이라는 걸 기억할 때, 나이에 상관없이, 어린 사람도 동등한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어린이·청소년을 미래의 희망이라고 부르면서 오늘의 삶이나 행복을 경시하는 모습, 나이를 먹은 뒤에 하라며 현재의 권리와 참여를 유예시켜도 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사람이 더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캠페인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린이·청소년을 존중할 것을 약속하면 어떨까요?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일상 언어 속 차별 문제 '열한 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