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채움활동가 진냥 님이 지난 2월 19일, '[시국토론회] 세대와 젠더 분열을 넘는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포럼 : 미투에서 대선까지'에 토론자로 참여했어요.
토론회 전체 자료집을 첨부하며, 진냥 님의 발표문을 게시합니다.
혐오에 더이상 권력을 쥐어주지 말라
진냥(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대선을 앞두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기가 곧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의 집권기가 시작될 것이다.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은 지난 정부 집권기동안의 평가다. 이 글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기 동안 교육과 학교의 영역을, 어린이와 청소년의 현실을, 젠더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 미투와 성평등에 대한 요구가 전면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탄핵집회로 탄생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잊은 듯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여성 혐오와 성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여성으로서 비하하고 추행하는 것이 마치 정치적 액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불특정 다수 수만명이 운집한 집회에 여성의 몸을 만지기 위한 목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선언’과 행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에 맞서 서울에서는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박하여행)>이, 대구에서는 <평등한 연대> 등 여러 실천단체들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여성혐오에 문제를 제기했다.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 이듬해, 2018년 1월. 학교에서 교사로 인한 성폭력이 폭로되었다. 스쿨미투의 시작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성폭력 공론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 내내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년간의 정체를 깨고 제정이 시도된 경남학생인권조례를 위하여, 동성애 혐오단체들에 맞서 도의회 앞에 천막을 지킨 것도 청소년들이었다. 현재 제정이 시도되고 있는 부산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외치고 교육감 면담을 요구하며 교육청에서 연좌시위를 한 사람들도 청소년들이다. 2020년, 교사로 인한 학교내 불법촬영 사건에서도 졸업생들은 물론, 현재의 재학생들도 나서 기자회견을 하고, 교육청보다도 먼저 디지털성폭력 대응 전략을 담은 포스터를 제작해 학교들에게 배포했다. 지금의 대선정국은 지난 정부 집권기 내내 외쳐진 이 목소리들에 응답하고 있는가?
청소년들의 높아진 정치적 효능감
공식적인 집계는 아니나, 여러 언론보도에서 촛불탄핵집회 참가자 중 10~15% 정도가 청소년이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실제로 시민이 역사를 바꾸어내는 과정을 목격한 청소년들은 직후에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한국 사회의 정치는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용되기에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촛불은 함께 들었으나 새로운 정부를 함께 세울 순 없었던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치가 청소년들에게 빚지는 것이었고, 청소년들의 높아진 정치적 효능감과 실천에 현실이 모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그 모순을 지적했고 30여년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던 만18세 선거권을 이루었다. 그리고 최근,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굴욕적이고 위헌적인 단서조항이 있지만, 만 16세로 정당 가입 가능연령이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이 청소년은 정치를 ‘허락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무서운 십대’), 한편으로는 무시하고 깔보며(‘급식충’) 기성세대의 과거와 동일시되거나(‘라떼는 말이야’) 미래의 주인공(‘꿈나무’)로 여겨지는 어린이 청소년은 현재에서 계속 밀려난다. 근거 없이 진보적이기를 기대받고 강압적으로 보수적이기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프레이지(2002)의 지적처럼 학생은 “주변인도 아니고 사회의 ‘바깥’에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기에 그들은 언제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청소년의 존재는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왜 젠더의 영역은 예외인가
2022학년도 교육과정을 고민중인 한 고등학교 교사가 올해에는 기후생태 동아리를 해야겠다고, 예전에 성평등 관련 동아리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건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학생들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토론하고 성평등에 대해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고,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지만 그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후 찾아왔을 때, 페미니즘이 커리어에 있으면 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취업까지 가지 않아도, 기후생태 관련 활동은 학생생활기록부에 적히면 대학입시에 도움이 되지만 페미니즘 관련 활동은 도움이 되지 않기에 학생들을 생각하면 동아리 주제를 젠더와 관련있게 잡지 않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자 증언이었다. 공동체의 구조나 평등을 고민하는 대신, ‘페미가 회사에 들어오면 미투를 일으키기 쉽다’는 식의 리스크로 페미니즘에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읽는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전자시스템에 기록되고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그 정보가 공유되는 한국의 반인권적인 교육체제의 문제이다. 학생사찰이라고도 비판받았던 학생에 대한 기록은 제도화되면서 가진 자에게는 부모의 권력을 자녀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전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페미니즘 백래시와 결합해서 ‘페미를 걸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인 백래시이자 자본주의의 백래시다.
앞서 말했듯, 청소년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높아지고 있다. 실천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조금씩 더 확보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젠더영역은 어떠한가? 물론 이 역시 높아지고 있다. <청소년페미니스트네트워크 위티>의 등장과 활동은 눈부시고 역사상 가장 평등의식이 높은 10~20대 여성 세대의 등장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페미’와 ‘일베’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쟤, 페미다’라는 말 한 마디로 집단적 따돌림을 겪게 되는 학교 상황에서, 입시와 취업의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혐오는 구조가 되고 있다.
혐오에 더이상 권력을 쥐어주지 말라
몇몇 교사들은 교육 공간 안에서 여성혐오는 점차 그 강도가 확연히 세지고 있는데 정작 여성 학생들은 그에 대해 무관심해 보인다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특별히 젠더 인식이 없더라도 자신을 향한 혐오의 강도가 세어지면 그에 대한 반동을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교사가 나서서 이런 발언까지도 나오고 있다며 생각을 물어도 별 다른 반응이 없어서 답답하고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혐오가 거세어지는 것에는 사람들이 주목하면서 그에 대한 ‘반동’을 확장하는 것은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답답해했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 보다 노골적인 성차별과 폭력이 좀 더 빈번했을 때, 학생들은 그 순간 순간 저항하기 어려웠다. 성차별과 폭력은 ‘그래도 되는 일’이었고 가끔은 학생대표를 여학생에게는 맡길 수 없으니까 행하는 ‘옳고 당연한 일’이었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인정되는 권력의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교육의 공간 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대선 정국에서 여성혐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혐오는 권력을 획득했다. 대신 ‘성’이 부각되지 않는 평등이 주장된다. 일은 똑같이 나누어 분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이루는 것은 개인의 역량이며, 능력이 있다면 성, 장애, 인종, 계급 등 다른 상황 속에서도 능력이 있다면 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역량을 갖추지 않고 혐오와 차별에 반박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패배자로 여겨진다.
이렇듯 혐오는, 원래 교육의 본질이 아니었으나 마치 교육의 역할처럼 보이는 능력주의를 통해 그 권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린이 청소년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페미니즘 교육을 획책하는 지하조직이 존재하고 이 불법적 조직을 찾아내 어린이 청소년을 구원해야 한다는, 조작된 가짜 청원도 등장했다. 성교육은 청소년을 섹스 중독에 빠뜨리기 때문에 막아야 하고, 성평등은 동성애를 조장하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는 혐오적 언행들이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은 늘 근거가 된다. 대선후보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여성가족부 논쟁에서도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여성가족청소년부’였다. 정작 어린이 청소년의 목소리는 가시화되지 않고, 혐오에 권력을 쥐어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린이와 청소년은 소환될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등이다
근래의 교육 공간, 특히 학교는 과거보다 더 진보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진보의 방향에는 인권과 평등, 민주주의가 존재했거나 적어도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되었다. 그러나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지는 알 수 없다. 한국 교육사에서 현재는, 평등이 역차별로, 비폭력과 안전에 대한 요구가 ‘반항’으로 여겨지는 최초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학생인권담론이 교육권의 사회화에 기여했으나, 여전히 학생인권은 중요한 교육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하나의 쟁점으로만 인식되고 있다(유성상, 2020).특히 학생인권은 교권과, 청소년 인권 및 아동 인권은 청소년범죄 등의 다른 쟁점들과 갈등적 구조로 비춰지면서 지지하기 부담스럽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성평등 역시 같은 경로를 밟고 있다. 스쿨미투 운동은 젠더감수성이 교육 공간에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모든 국민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라는 국민청원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스쿨미투에서 계속 지적되었던 문제는, 엄벌주의로 대응이 귀결되면서 스쿨미투 운동을 학교 구조의 위계, 폭력에 대한 폭로가 아닌 피-가해자 간의 관계로 축소시키고, ‘꽃뱀’이나 선동 혹은 ‘영악’하거나 ‘싸가지 없는’ ‘나쁜 애’가 아닌, ‘순수한 미투’만이 인정되었다는 점이었다(하영, 2021). ‘의도’나 ‘목적’이 있는 폭로라면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치로, 가해자가 안타까운 피해자로 순식간에 전복되었다. 피해자는 끊임없이 평가당하고 저울 위에서 가늠된다. 차별받는다.
그래서 미투를 넘어서기 위해 더 강화되어야 할 것은, 편가르지 말라는 요구다. 해방은 조건이 아닌 존재로서 인정될 때 가능하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처럼 ‘나쁜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될 때 모든 피해자는 피해자로 존중받을 수 있다. 훌륭하고 모범적인 어린이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싸가지 없고 저항적이며 못된 어린이 청소년의 목소리가 정치의 영역에서 울려 퍼질 수 있어야 한다. 공부 못하고 대학에 가지 않고 예뻐지려고 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이 행복한 사회가 요구한다.
더 이상 혐오에 권력을 쥐어주지 말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평등이다.
참고문헌
프레이지. (2002). 페다고지. 남경태 역. 서울: 그린비.
하영. (2021). 교권 그리고 담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20회 전국참교육실천대회 토론
마당 ‘교권은 학생인권이 (불)편할까?’ 자료집.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채움활동가 진냥 님이 지난 2월 19일, '[시국토론회] 세대와 젠더 분열을 넘는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포럼 : 미투에서 대선까지'에 토론자로 참여했어요.
토론회 전체 자료집을 첨부하며, 진냥 님의 발표문을 게시합니다.
혐오에 더이상 권력을 쥐어주지 말라
진냥(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대선을 앞두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집권기가 곧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의 집권기가 시작될 것이다.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은 지난 정부 집권기동안의 평가다. 이 글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기 동안 교육과 학교의 영역을, 어린이와 청소년의 현실을, 젠더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는 그 어느 시기보다 미투와 성평등에 대한 요구가 전면화되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탄핵집회로 탄생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잊은 듯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는 여성 혐오와 성폭력에 저항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여성으로서 비하하고 추행하는 것이 마치 정치적 액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불특정 다수 수만명이 운집한 집회에 여성의 몸을 만지기 위한 목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선언’과 행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에 맞서 서울에서는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박하여행)>이, 대구에서는 <평등한 연대> 등 여러 실천단체들이 촛불집회 현장에서 성차별과 성폭력 모니터링을 실시하고 여성혐오에 문제를 제기했다. 문재인 정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 이듬해, 2018년 1월. 학교에서 교사로 인한 성폭력이 폭로되었다. 스쿨미투의 시작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성폭력 공론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집권기 내내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수년간의 정체를 깨고 제정이 시도된 경남학생인권조례를 위하여, 동성애 혐오단체들에 맞서 도의회 앞에 천막을 지킨 것도 청소년들이었다. 현재 제정이 시도되고 있는 부산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외치고 교육감 면담을 요구하며 교육청에서 연좌시위를 한 사람들도 청소년들이다. 2020년, 교사로 인한 학교내 불법촬영 사건에서도 졸업생들은 물론, 현재의 재학생들도 나서 기자회견을 하고, 교육청보다도 먼저 디지털성폭력 대응 전략을 담은 포스터를 제작해 학교들에게 배포했다. 지금의 대선정국은 지난 정부 집권기 내내 외쳐진 이 목소리들에 응답하고 있는가?
청소년들의 높아진 정치적 효능감
공식적인 집계는 아니나, 여러 언론보도에서 촛불탄핵집회 참가자 중 10~15% 정도가 청소년이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거리에서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실제로 시민이 역사를 바꾸어내는 과정을 목격한 청소년들은 직후에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한국 사회의 정치는 선거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용되기에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촛불은 함께 들었으나 새로운 정부를 함께 세울 순 없었던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정치가 청소년들에게 빚지는 것이었고, 청소년들의 높아진 정치적 효능감과 실천에 현실이 모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청소년들은 그 모순을 지적했고 30여년동안 이루어지지 못했던 만18세 선거권을 이루었다. 그리고 최근,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굴욕적이고 위헌적인 단서조항이 있지만, 만 16세로 정당 가입 가능연령이 낮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어린이 청소년은 정치를 ‘허락받지’ 못한 존재들이다.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무서운 십대’), 한편으로는 무시하고 깔보며(‘급식충’) 기성세대의 과거와 동일시되거나(‘라떼는 말이야’) 미래의 주인공(‘꿈나무’)로 여겨지는 어린이 청소년은 현재에서 계속 밀려난다. 근거 없이 진보적이기를 기대받고 강압적으로 보수적이기를 요구받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프레이지(2002)의 지적처럼 학생은 “주변인도 아니고 사회의 ‘바깥’에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기에 그들은 언제나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역사 속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청소년의 존재는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왜 젠더의 영역은 예외인가
2022학년도 교육과정을 고민중인 한 고등학교 교사가 올해에는 기후생태 동아리를 해야겠다고, 예전에 성평등 관련 동아리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건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해서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학생들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토론하고 성평등에 대해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고,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지만 그 학생들이 졸업하고 난 후 찾아왔을 때, 페미니즘이 커리어에 있으면 취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취업까지 가지 않아도, 기후생태 관련 활동은 학생생활기록부에 적히면 대학입시에 도움이 되지만 페미니즘 관련 활동은 도움이 되지 않기에 학생들을 생각하면 동아리 주제를 젠더와 관련있게 잡지 않게 될 것이라는 고백이자 증언이었다. 공동체의 구조나 평등을 고민하는 대신, ‘페미가 회사에 들어오면 미투를 일으키기 쉽다’는 식의 리스크로 페미니즘에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읽는 책 한 권 한 권이 모두 전자시스템에 기록되고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그 정보가 공유되는 한국의 반인권적인 교육체제의 문제이다. 학생사찰이라고도 비판받았던 학생에 대한 기록은 제도화되면서 가진 자에게는 부모의 권력을 자녀 세대에게 효과적으로 전이할 수 있는 수단으로, 페미니즘 백래시와 결합해서 ‘페미를 걸러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적인 백래시이자 자본주의의 백래시다.
앞서 말했듯, 청소년들의 정치적 효능감은 높아지고 있다. 실천하고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조금씩 더 확보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젠더영역은 어떠한가? 물론 이 역시 높아지고 있다. <청소년페미니스트네트워크 위티>의 등장과 활동은 눈부시고 역사상 가장 평등의식이 높은 10~20대 여성 세대의 등장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페미’와 ‘일베’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쟤, 페미다’라는 말 한 마디로 집단적 따돌림을 겪게 되는 학교 상황에서, 입시와 취업의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혐오는 구조가 되고 있다.
혐오에 더이상 권력을 쥐어주지 말라
몇몇 교사들은 교육 공간 안에서 여성혐오는 점차 그 강도가 확연히 세지고 있는데 정작 여성 학생들은 그에 대해 무관심해 보인다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특별히 젠더 인식이 없더라도 자신을 향한 혐오의 강도가 세어지면 그에 대한 반동을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교사가 나서서 이런 발언까지도 나오고 있다며 생각을 물어도 별 다른 반응이 없어서 답답하고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혐오가 거세어지는 것에는 사람들이 주목하면서 그에 대한 ‘반동’을 확장하는 것은 왜 이야기하지 않는지 답답해했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형태가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 보다 노골적인 성차별과 폭력이 좀 더 빈번했을 때, 학생들은 그 순간 순간 저항하기 어려웠다. 성차별과 폭력은 ‘그래도 되는 일’이었고 가끔은 학생대표를 여학생에게는 맡길 수 없으니까 행하는 ‘옳고 당연한 일’이었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인정되는 권력의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교육의 공간 내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대선 정국에서 여성혐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혐오는 권력을 획득했다. 대신 ‘성’이 부각되지 않는 평등이 주장된다. 일은 똑같이 나누어 분담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이루는 것은 개인의 역량이며, 능력이 있다면 성, 장애, 인종, 계급 등 다른 상황 속에서도 능력이 있다면 해낼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역량을 갖추지 않고 혐오와 차별에 반박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패배자로 여겨진다.
이렇듯 혐오는, 원래 교육의 본질이 아니었으나 마치 교육의 역할처럼 보이는 능력주의를 통해 그 권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린이 청소년을 끊임없이 소환한다. 페미니즘 교육을 획책하는 지하조직이 존재하고 이 불법적 조직을 찾아내 어린이 청소년을 구원해야 한다는, 조작된 가짜 청원도 등장했다. 성교육은 청소년을 섹스 중독에 빠뜨리기 때문에 막아야 하고, 성평등은 동성애를 조장하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는 혐오적 언행들이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아이들”은 늘 근거가 된다. 대선후보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여성가족부 논쟁에서도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여성가족청소년부’였다. 정작 어린이 청소년의 목소리는 가시화되지 않고, 혐오에 권력을 쥐어주기 위한 수단으로서 어린이와 청소년은 소환될 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등이다
근래의 교육 공간, 특히 학교는 과거보다 더 진보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이 진보의 방향에는 인권과 평등, 민주주의가 존재했거나 적어도 존재해야 한다고 요구되었다. 그러나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지는 알 수 없다. 한국 교육사에서 현재는, 평등이 역차별로, 비폭력과 안전에 대한 요구가 ‘반항’으로 여겨지는 최초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학생인권담론이 교육권의 사회화에 기여했으나, 여전히 학생인권은 중요한 교육정책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하나의 쟁점으로만 인식되고 있다(유성상, 2020).특히 학생인권은 교권과, 청소년 인권 및 아동 인권은 청소년범죄 등의 다른 쟁점들과 갈등적 구조로 비춰지면서 지지하기 부담스럽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성평등 역시 같은 경로를 밟고 있다. 스쿨미투 운동은 젠더감수성이 교육 공간에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고, 모든 국민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라는 국민청원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스쿨미투에서 계속 지적되었던 문제는, 엄벌주의로 대응이 귀결되면서 스쿨미투 운동을 학교 구조의 위계, 폭력에 대한 폭로가 아닌 피-가해자 간의 관계로 축소시키고, ‘꽃뱀’이나 선동 혹은 ‘영악’하거나 ‘싸가지 없는’ ‘나쁜 애’가 아닌, ‘순수한 미투’만이 인정되었다는 점이었다(하영, 2021). ‘의도’나 ‘목적’이 있는 폭로라면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치로, 가해자가 안타까운 피해자로 순식간에 전복되었다. 피해자는 끊임없이 평가당하고 저울 위에서 가늠된다. 차별받는다.
그래서 미투를 넘어서기 위해 더 강화되어야 할 것은, 편가르지 말라는 요구다. 해방은 조건이 아닌 존재로서 인정될 때 가능하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처럼 ‘나쁜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될 때 모든 피해자는 피해자로 존중받을 수 있다. 훌륭하고 모범적인 어린이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싸가지 없고 저항적이며 못된 어린이 청소년의 목소리가 정치의 영역에서 울려 퍼질 수 있어야 한다. 공부 못하고 대학에 가지 않고 예뻐지려고 하지 않는 어린이 청소년이 행복한 사회가 요구한다.
더 이상 혐오에 권력을 쥐어주지 말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평등이다.
참고문헌
프레이지. (2002). 페다고지. 남경태 역. 서울: 그린비.
하영. (2021). 교권 그리고 담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제20회 전국참교육실천대회 토론
마당 ‘교권은 학생인권이 (불)편할까?’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