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음 활동]제12회 청소년활동가마당 '극우화가 뭐 어쨌다고?'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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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5일 열린 제12회 청소년활동가마당 '극우화가 뭐 어쨌다고?' 자료집입니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의 난다 활동가가 발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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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극우화와 다 글러먹은 대안들

: 청소년인권운동의 실마리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청소년 극우화 ‘담론’의 문제점


윤석열 대통령이 벌인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극우’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부상했다. 군대를 동원한 계엄령을 옹호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설파하는 윤석열 지지자들의 모습, 특히 2025년 1월 일어난 서울 서부지방법원 폭동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전부터 극우세력과 그들의 운동은 꾸준히 존재해왔고 그 영향력도 작지 않았다. 그러다 ‘반국가세력 척결’을 내건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와 부정선거 주장 등으로 인해 대중의 주목이 끌렸고, ‘극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논의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 요지는 10~20대 집단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극우 성향이 강하고 특히 남성 집단이 그러하며, 이는 이질적이거나 특별히 문제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국리서치의 〈수면 위로 떠오른 극우: 한국 사회 극우의 현주소〉( 한국리서치, 18세 이상 1,000명, 2025년 3월 21일 ~ 3월 24일 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21%가 극우 성향으로 나타난 데 비해 18~29세 남성은 33%가 극우 성향으로 나타났다. 한국일보가 2025년 9월 보도한 조사(16~22세 1,070명, 2025년 5월 28일 ~ 6월 2일 조사. 데이터스프링 조사, 언더스코어 분석.)에서는 반중감정, 성차별, 능력주의 옹호 등 여러 정치 인식을 물었는데, 10~20대에서 전반적으로 보수적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10대의 43.9%가 “선거에서 개표 부정이 발생하기 쉽다”는 데 찬성했다는 대목이 주목받기도 했다. 

여러 조사에서 ‘청소년-청년 남성 집단이 더 극우적/보수적’이라고 나타나고 있다는 점, 남성 청소년들 사이에서 여성 혐오,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혐오, 혐중 음모론, 독재 옹호 등의 문화가 표출되고 있다는 점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담론, 이 문제가 이야기되는방식은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청소년을 문제집단으로 타자화하는 진부한 구도가 반복되고 있고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먼저 ‘극우’ 담론 자체가 대두한 맥락을 돌아보자. 이 개념은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법원 폭동 사건 등을 거치며 많이 쓰이게 되었고, ‘윤석열 지지자’라는 정치적 맥락과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사회과학적 조사나 연구에서는 ‘극우’를 정의하는 데에 상당한 조심성과 엄밀성을 보이곤 하지만,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논의될 때는 윤석열에 동조하거나 부정선거 음모론을 추종하는 것이 곧 극우로 동일시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개념은 ‘정상적인 보수-진보’의 범위를 벗어난 극단적이고 문제적인 대상을 구분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는 차별, 폭력, 반민주주의를 초래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극우’라고 이름 붙여진 집단과 그들의 주장을 제거·해결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이에 더해 연령과 성별을 기준으로 집단을 묶는 세대론과 청소년들을 한 덩어리인 양 단순화하는 습성(“요즘 애들은” 같은)이 결합하면서, ‘청소년(+남성)들이 문제’라는 구도로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여러모로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여러 조사에서 청소년-청년의 20~30% 내외가 극우 성향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지만 또 70~80%는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의 어떤 행태가 문제인지를 짚기 위해서는 더 섬세하고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나아가 위헌인 비상계엄을 지지하거나 음모론을 믿는 것 말고도, 소수자 혐오나 시험능력주의에 경도된 성향, 반노동적인 태도, 차별적이고 우파적인 그 흔한 가치관은 지금의 ‘극우’라는 이름 아래 충분히 문제시되고 다루어질 수 있을까.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은 청년 담론의 일종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청소년 혹은 청년들을 기존 사회의 체제와 문화와 동떨어진 타자화된 존재로 그리는 담론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도덕적·문화적으로 젊은이들을 손가락질하고 혐오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반면 정치적으로는 ‘젊은 피’니, ‘청년 기수’니 하는 표현들이 보여주듯, 젊은이들이 진취적이고 개혁적일 것이라는 기대와 요구가 존재해 왔다. 그러다가 20대 투표 성향이나 대학생운동의 위축 등 그러한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 보이자, 2000년대 후반에는 ‘20대 개새끼론’ 같은 말까지 등장했다. ‘청소년-청년 극우화론’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젊은이’들을 부정적으로 보든 긍정적으로 보든, 기성세대 및 기존 사회와 분리되어 있고 ‘뭔가 다를 것 같은’ 존재로 바라보는 전제 자체가 나이주의적이고 차별적이라고 청소년인권운동은 비판해 왔다. 청소년-청년이 사회 체제 안에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자화하려는 습관을 멈추는 데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한다.

10대 정치인식조사를 한 한국일보 보도에서도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다. “10대 대부분은 남녀 구분 없이 계엄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히는 등 상식적인 사고관을 보여줬다. 청소년 다수가 극우화했다기보다는 남성 10대를 중심으로 우경화하고 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고교생 10명 중 4명 ‘개표 부정’ 믿고 계엄엔 반대…’십대남’ 현상 확인됐다, 한국일보, 2025년 9월 2일.)

사회 전반이 우경화되면서 청소년들도 우경화되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이고, ‘극우 성향의 증가’는 그 결과로 나타난 표면적 현상이라고 파악하면 무엇이 문제인지가 달라진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나 한국 사회나 왜 점점 더 우경화하고 있는가? 왜 젊은 남성 집단은 그것에 더 큰 영향을 받는가? 어떤 요소가 작용했는가?’와 같은 좀 더 적절한 질문이 필요할 것이다. 청소년들을 타자화하는 담론은 이제 ‘정상적인 어른들’이, 학교가 이들을 교육/치료해야 한다는 해결책과 정책으로 나타나고 있다. 누군가는 토론 교육이나 가짜 뉴스에 속지 않게 하는 교육으로 청소년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각에서는 교사들의 정치적 권리 보장(정치적 권리 보장은 정말 중요한, 오래된 과제이지만 청소년들에게 정치 교육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주장은 정말 이상하다)과 교권 강화 등을 이야기한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국회의원이 2025년 8월에 추진하겠다고 밝힌 ‘교실 극우화 방지 3법’은 △ 교원의 정치 기본권 보장, △ 디지털 미디어 문해력 교육 강화, △ 가짜뉴스 및 명예훼손 대응을 위한 정보통신망법 개정 등이라고 한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무슨 교육을 해서 어떤 능력을 길러 주면 극우화가 방지될 거라는 생각은 개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기도 하고, 지나친 교육만능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청소년-청년 극우화 담론이 향하는 곳이, 기존 사회 체제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극우화되는 남성 청소년들을 교정, 보호, 구원해야 한다는 정책이라면 너무나 부적절하지 않은가.


학교는 극우가 아니었나


10대 청소년이었을 때,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부터 학교생활에 여러 불만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답답함과 분노가 정당하다는 확신이 없었다. 세상에 대한 의문이나 삶에 대한 고민 등 학교 수업(정확히는 시험 공부)과 상관없는 질문들은 허락되지 못했다. 학교는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경례 강요, 획일적 제복과 외모 단속, 통제와 처벌 위주의 규칙, 군사주의적 질서, 극심한 경쟁과 능력주의 옹호 등 학교 생활의 모든 것이 반민주주의적, 극우적 문화의 형태였다.

학생을 평가하고, 벌 주고, 겁을 주는 문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하는 체념도 일상화되었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의 교육이라 하지만, 학교 안에는 여전히 반민주주의적인 요소들이 주류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었다. 교육 과정에도 민주주의와 인권이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긴 했지만, 실제 학교생활은 그와는 정반대의 사회였다. 민주주의는 실제 현실, 지금 우리 삶의 문제라기보다는 먼 미래의 일로 여겨질 뿐이었다. 어른들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친구와 경쟁해서 이겨야 했다.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들 했지만 “쟤는 좀 맞아야 해”라며 어떤 폭력은 정당화되기도 했다. 학교가 실제로 가르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능력주의와 경쟁의 논리였다. 입시와 성적 이외의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되었고, 학생들은 불안과 자기혐오를 내면화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억울하면 성공(출세)해라”라는 말이 통용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넘어 극소수를 위한 ‘그들만의 리그’로만 존재하는 게 지금의 교육 체제다. 이런 현실에서 이뤄지는 대안적인 시도나 교육 과정에 무작정 새 주제를 추가하자는 식의 해법은 공허하고 때로는 기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저항할 힘을 모으는 것도, 바뀔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학교에서부터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겪으며 세상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냉소가 강화되며 미래에 대한 전망을 그려 나가기도 힘들어지고 있다.

비교와 경쟁에 익숙해진 삶 속에서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불안감을 부른다. “인정받으려면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이 내면화된 결과는 일베와 같은 극우적 사상이 활발해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오늘날 청소년·청년의 극우화는 한국 사회와 교육의 오랜 극우적 체제가 마침내 꽃을 피운 결과일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꽃을 피운지도 오래되었으나, 별거 아닌 일처럼 취급해왔기에 뒤늦게 발견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극우적 가치와 문화가 가장 익숙하게 재생산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려 해 온 운동의 약화, 민주주의적 가치의 헤게모니 상실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요즘 10대들의 극우화’를 걱정하며 ‘이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는 식의 진단은 그래서 어불성설이다. 구조적 맥락을 삭제한 채 개인의 문제로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어떻게 함께 바꿀 것인가’를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른들’이 10대들을 나쁘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지켜줘야 한다는 보호주의적 통념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저항하는 10대들의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닌 것처럼, 극우적 세계관에 끄덕이는 10대들도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다.

약함을 혐오하며 강함을 숭배하게 만드는 세상, 손해 보는 것도 싫고 민폐 끼치는 것도 싫은 마음, ‘무임승차’에 대한 반감과 ‘어쩔 수가 없다’는 체념 모두 극우 사회의 뿌리고, 극우적 체제를 옹호하는 세계관이 극우화의 물결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뿌리를 건드리기 위해서는 극우적인 학교와 사회의 모습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며, ‘양극화와 불평등을 부추기는 능력주의’(한겨레, 샌델 “정치 양극화·불평등 부추기는 능력주의 폭정 끝내야”, 2025년 9월 23일)에 대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


청소년인권운동의 실마리


나에게 청소년인권운동과의 만남은 ‘비(非)시민’으로,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대충 살던 삶에 색깔을 칠하기 시작한 느낌이었다. 집회에 참여해 처음 만난 사람들과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던 경험, 다른 사람들과 모임을 꾸리고, 회의를 하고, 문제의식을 나누고,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내며 서로의 동료가 되었던 경험, ‘학생답지 않은 일상’을 살아냈던 날들은 삶을 바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학교나 다른 사람이 정해준 시간표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내 시간과 일상과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 이 세상을 다시 신뢰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준 것이다. 다른 청소년들에게도 이런 만남과 경험이 필요하다. 지금, 폐허처럼 느껴지는 이 세상에서도 다시 싹을 틔울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의 운동이 만들어온 이야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극우화, 우경화되는 추세에 맞서려면,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자기 삶을 설명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삶과 세계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는지를 말하는 대안적인 세계관과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여러 혐오 음모론이 확산되고 극우적 세계관이 사람들에게 수용된 데에는 (자본주의) 사회가 의미 있는 삶의 방식과 세계관을 상실한 탓이 크다. 거시적·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발전, 연대와 해방 등의 보편적·좌파적 서사가 좌절되었고,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경제적·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 ‘개성을 발휘하며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등의 약속이 힘을 잃었다. 이런 조건 아래 과거의 가부장적 가족으로 돌아가려는 논리나 불행을 외부(이주민, 소수자 등)의 탓으로 돌리려는 주장이 득세하고, 체제 친화적이며 쉽게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보수-극우적 행동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래서 청소년인권운동은 물론, 인권운동에서 더 보편적이고 해방적인 세계관과 서사를 다시 만들고 공유할 필요가 있다. 여러 조사에서 10~20대에서 여성 집단이 남성 집단보다 덜 극우적이라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현실에서 극우 정치를 대표하는 세력(윤석열, 이준석, 국민의힘 등)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옹호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는 것을 무기 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젊은 여성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이 되어준 점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이야기하는 ‘미성숙하고, 가진 게 없고, 잘난 게 없더라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라거나, 경쟁과 시험에 맞선 ‘실패담’ 등 대안적인 세계관과 서사를 퍼뜨리는 운동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 혐오와 차별이 놀이가 되었다는 걸 문제시하며 규제와 교육의 필요성, 스마트폰(유튜브나 SNS) 중독 문제를 강조하는 기사를 자주 접할 수 있다.(10대 일상으로 침투한 ‘극우’‥조롱과 혐오가 놀이?, MBC, 2025년 8월 12일.) 이 이슈에 대해서도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지만, 막상 사람들에게 휴식과 놀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서 휴식은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쉬는 시간’은 다음 단계를 위한 발판일 뿐 그 자체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못한다. 놀이와 오락, 즉 게임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소홀하게 대하는 행위다. 경쟁 압박이 강할수록 ‘같이 놀기’도 쉽지 않은데 놀 시간도 부족할 뿐더러, 놀 수 있는 공간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히 쉬고 놀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자와 깊이 접촉하고 다양한 관계망을 통해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놀이를 통해서 관계를 형성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익힌다. 여유가 있어야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불편이나 불쾌감을 감수할 수도 있다. 놀이와 휴식이 가진 의미를 상기할 때, 극우화에 맞설 실마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입시 경쟁에 반대하며 휴식권, 학습시간 줄이기 등을 요구해온 청소년인권운동의 경험과 담론을 토대로, 잘 쉬고 잘 놀 수 있는 사회를 더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외에도 여러 의견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힘을 북돋는 시간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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