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인권] 열사, 과거와 현재의 대화 (2018년)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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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45호 (2018년 7.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열사, 과거와 현재의 대화
- 고등학생운동 열사들의 추모 행사를 다니며


공현


고등학생운동의 열사 세 명의 이름, 김수경, 심광보, 김철수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2007년 무렵, 청소년인권운동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공부와 조사를 진행할 때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다소 막연하게 그런 사람들, 그런 죽음들이 있었나 보다 생각하는 정도다. 그러다가 내가 그들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인식하고 현재 청소년운동의 문제로 고민하게 된 계기는 2013년 11월 22일 전교조 주최로 열린 ‘참교육 학생 열사, 교육운동의 길을 묻다?’라는 이름의 간담회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양돌규, 배이상헌 등이 발제를 통해 이들 열사들을 기억하는 교육운동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는데, 청소년운동의 활동가들도 함께 참여하여 원론적으로나마 청소년운동의 과제도 같이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간담회 이후에도 김수경, 심광보, 김철수 열사를 기억하고 현재의 실천으로 연결하기 위한 활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고등학생운동의 열사들을 청소년운동과 연결하는 일은, 해묵은 숙제로 내 마음 한 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안을 생각해 보고 단체에 제안도 해 보았지만, 무언가 활동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던 차다. 그래서 2018년에는 일단 몸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열사들의 추모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것이다. 교육공동체 벗과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등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들에 이러한 뜻을 공유하고, 청소년인권활동가들 중 운동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한 사람들을 모아서 같이 갈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모든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처음 참석한 자리는 6월 2일, 광주 망월공원묘지의 5.18 묘역에서 열린 김철수 열사 27주기 추모식이었다. 전날 광주로 가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다른 청소년인권활동가 두 명과 함께 5.18 묘역으로 향했다. 추모식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이 함께했다.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사람들, 보성고등학교 학생들 등 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발언과 공연이 이어졌다. 교사이자 고등학생운동 열사들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인 배이상헌 조합원도 만날 수 있었다. 김현진 전교조 전남지부장과 김철수 열사가 재학 중이었던 보성고등학교의 우현아 학생회장의 인사말을 들으며 김철수 열사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떠올렸다.


 김철수 열사는 1989년 전남 보성군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활동했다. 풍물 연수를 기획하여 노력 끝에 풍물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1991년 4월 26일 대학생 강경대가 경찰의 폭력 진압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노태우 정권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 중에 분신으로, 경찰에 의해 계속해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당시 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균, 경원대 천세용 등 ‘분신 학생 열사’들은 모두 고등학생운동 경험이 있었다.➊ 보성고 3학년이었던 김철수 열사는 5월 18일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추모 행사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 등의 말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2일 면했다. 김철수 열사가 남긴 녹음에 의하면 그는 박승희의 분신 이후 죽음을 각오했다고 한다. 1991년 강경대 열사 투쟁, ‘분신 정국’의 한복판에 김철수를 비롯해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➊ (양돌규(2002),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자율평론》 3호.


그런 생각을 하며 추모 행사 자료집을 훑어보고 있으니, 김철수 열사의 약력에 “생활어 최우수상 수상”, “모의고사 문과 수석” 등의 이력을 적은 것이 눈에 띄었다.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돌아가신 열사의 약력에 굳이 그런 내용을 적어야 했을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우현아 보성고 학생회장이 “여느 고등학교 3학년처럼 입시에 치여 살고 있”어서 김철수 열사의 유언대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지금 노력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김철수 열사가 비판한 ‘로보트를 만드는 교육’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도 했다. 김철수 열사의 묘를 참배하며 살펴보니 묘비 옆에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유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기차 시간 때문에 좀 이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는 함께 간 활동가들과 열사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방식, 말하자면 ‘열사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한 명의 열사의 생애와 투쟁은 다면적일 수 있다. 김철수 열사의 경우 묘비에는 “애국 고등학생”이라는 수식어가 적혀 있고, 또 다른 이름으로는 “참교육의 불꽃”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노태우 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외쳤다. 분명 김철수 열사의 죽음은 노태우 정권과 강경대 열사 투쟁 정국이라는 시대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만약 김철수 열사가 ‘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드는 교육’을 비판하며 분신한 고3 학생으로 기억된다면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열사의 생애와 투쟁에 담겨 있는 다양한 측면을 어떻게 살려 내고 드러낼 것인지는 결국 현재의 운동과 단체들의 몫일 듯하다.



학교의 괴롭힘 때문에


며칠 지나지 않아 6월 6일 현충일 아침, 김수경 열사 추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날은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나 혼자 나선 여정이었다. 다행히 2~3년 전 김수경 열사 추모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는 다른 이의 소개로 추모 사업회 회원 정은정 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정할 수 있었다. 김수경 열사의 묘역은 대구광역시 북구를 조금 벗어나 칠곡군에 위치한 현대공원 안에 있다. 전철을 타고 태전역에 내려서 정은정 님의 자동차에 얻어 타 함께 묘역으로 향했다.


김수경 열사 추모 행사의 분위기는 김철수 열사 추모 행사와 사뭇 달랐다. 김수경 열사 추모 행사에는 15명 내외가 참석하여 조촐한 편이었고, 묘역도 넓지 않아서 옹기종기 둘러서서 확성기도 없이 진행되었다. 듣기로는 김수경 열사 추모 사업회는 대부분 김수경 열사의 동기 또는 선후배로 같이 운동을 했던 이들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동창의 안부를 묻는 인사들이 많이 오갔다. 이제 그 세대가 40대가 되었으니, 자식을 포함하여 가족 동반으로 참가한 이들도 많았다. 유가족은 참석하지 않았고, 김수경 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당시의 해직 교사와 전교조 대구지부 활동가, 대구경북 지역 추모연대 사람들 등이 참석했다. 참가자가 적다 보니 고루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고, 나에게도 발언 기회가 왔다. 나는 청소년운동에서 고등학생운동의 열사들을 기억하고 이후 활동에 연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김수경 열사의 묘비에는 “참교육의 등불 김수경 열사”, “김수경 열사를 가슴에 새긴 많은 이들이 이 비를 세움”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김수경 열사는 대구 경화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1989년, 전교조 출범과 해직 사태를 겪었다. 경화여고 학생들은 1988년 강제적인 자율·보충 학습 폐지 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1989년 시험 연기 결의, 조기 방학 거부 시위와 농성 등으로 전교조 교사 해직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김수경 열사는 1990년 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했다가 학교 측이 밀고 있는 후보에 맞서기 위해 차은남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고, 차은남 학생회장이 당선된 후에는 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학생회 활동을 방해했고 김수경 열사 등 몇몇 학생들을 찍어 놓고 탄압을 가했다. 1990년 6월 5일 김수경 열사는 사소한 일을 빌미로 교사에게 폭행과 폭언을 당했고, 그날 밤 경북 경산 남대에서 투신하여 면했다. 김수경 열사는 “우리 학교는 다닐 곳이 못 된다는 걸 느꼈고 한번 운동권으로 찍힌 학생은 사사건건 트집이 된다”(차은남 학생회장에게 남긴 편지), “작년에 전교조를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런 선생님을 더 좋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학교 다니기가 불편하다면, 아니 고통스럽다면 이미 그곳은 학교가 아닙니다”(해직된 최진열 담임 교사에게 남긴 편지)라는 말을 남겼다. 김철수 열사가 노태우 정권과 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시위로서 분신을 했다면, 김수경 열사는 학교의 탄압에 고통받다가 죽음으로 항거했던 셈이다.


추모 행사에서는, 2013년 간담회에서 김수경 열사 추모 사업회장으로서 발표한 적이 있어서 나에게도 얼굴이 낯익은 한민정 님이 2018년 6월 지방 선거에 대구광역시 달서구의원 정의당 후보로 출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온 나를 맞이해 줬던 정은정 님도 대구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이렇게 지역에서 노동 현장에서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고등학생운동과 그 열사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문제 제기를 하고 활동을 하다가 탄압을 당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김수경 열사 추모 행사에 함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선거에 출마하여 자신들이 청소년기에 했던 활동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또 청소년들이 선거권을 갖고 있어서 그 경력에 주목하여 표를 던지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허황된 기대일까.


“가난해서 못 다닌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


마지막 한 명, 심광보 열사는 충북 충주고등학교에 1989년 입학했다가 1990년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서울에서 취업을 했다. 심광보 열사는 참교육을 위한 고등학생 모임인 ‘사람사랑’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당시 충주고에서 벌어지던, 학생들의 성적이 떨어지면 정신이 해이해졌다며 교련 조회를 실시하는 등의 폭력적 군대 문화와 고등학생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감시하며 다른 구성원을 고하면 장학금을 주겠다고 회유하는 행태에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다.


심광보 열사는 휴학 과정에서도 학교에서 “우리 학교에 전학 오려면 몇 천만 원을 낸다. 휴학계를 내면 다른 학생이 올 수 있는 자리가 생기지 않으니 자퇴를 해라”, “가난해서 못 다닌다는 것은 이유가 안 된다”는 등의 폭언을 들었다. 그는 휴학 후 서울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 현실과 빈곤 및 노동의 문제를 더 깊이 인식했고, 1990년 9월 7일 분신 후 투신하여 9월 8일 운명하다. 심광보 열사는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전교조와 주변 사람들에게 남긴 편지를 보면 참교육과 변화에 대한 희망과 의지가 느껴지나, 동시에 곪아 터진 교육과 세상에 대한 슬픔과 절망이 무겁게 깔려 있기도 하다. 심광보 열사는 폭력과 차별로 얼룩진 한국 교육과 불평등한 사회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올해는 고등학생운동의 세 열사들의 추모 행사를 모두 참석할 계획이라, 심광보 열사의 추모 행사가 있을 9월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충주 우륵아티센터에서 열린 심광보 열사 추모 행사 때 이상호 교육민주화유공자동지회 회장이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해 준 적이 있었지만 나는 먼저 정해진 일정 때문에 불참하여 더 아쉬움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상호 회장은 5.18 당시 청소년들의 운동과 고등학생운동에 관한 내용을 담은 《여기 학생과 교사가 있다 – 5.18 전북 항쟁과 촛불 청소년의 만남》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고, 해직 교사로서 1980년 5.18 무렵부터 고등학생운동을 지켜보고 지원했다. 그는 2018년 교육민주화유공자동지회 사무실 개소식을 하면서, 해직 교사들을 비롯해 교사운동이 고등학생운동을 기억하고 함께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 고등학생운동 열사들, 그리고 고등학생운동과 과거의 청소년운동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고등학생운동 열사, 참교육 열사, 청소년운동 열사


김수경, 심광보, 김철수 세 열사를 어떻게 부르느냐 하는 것은 곧 그들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방식과 맥락을 재배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열사들이 속했던 운동을 명확히 하려 한다면 고등학생운동 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전교조의 책무를 이야기하려 한다면 참교육 열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가 민주화운동 유공자 및 희생자를 기리고 보상을 하는 과정에서는 민주화운동 열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카의 유명한 문장을 비틀어 보자면, ‘열사’란, 그들에 대한 사실과 운동 주체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그 기억과 의미가 구성되는 것이다. 문제는 고등학생운동이 1990년대 이후 사실상 소멸했다고 해야 할 상황에서 김수경, 심광보, 김철수 열사를 기억할 지금의 ‘운동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은 지금도 이어지며 열사들을 기억하고 운동의 일부로 포함시키고 있고, ‘민주화운동’의 경우는 국가적 기념 사업이나 이미 사회 주류가 된 주체들에 의해 열사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 주체가 없다면 열사를 기억하는 일은 일부 추모 사업회 구성원들이나 유가족들의 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동안 전교조를 비롯한 교사운동이 김수경, 심광보, 김철수 열사에 대해 기억하는 지금의 운동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기도 했다. “참교육의 불꽃”, “참교육의 등불”과 같은 수식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오랫동안 전교조와 ‘참교육 1세대’의 맥락 속에서 호명되었고, 2013년 간담회에서도 그들을 “참교육 학생 열사”라고 불다. 교사운동, 나아가 교육운동에 열사들의 서사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공감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고민도 든다.


전교조 해직 교사들은 전교조를 지지하다, 교사 복직을 지지하다, 또는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학교를 민주적으로 만들기 위해 학교에서 부당하게 징계, 폭행을 당하고 경찰서에 끌려가 취조를 받고 협박을 당하고 실형까지 언도받은 학생들에 대해 무관심했고, 현장 조합원은 그들대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탄압에 대처하기에 바빠 학생들에 대한 탄압은 방관자의 입장에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 김수경열사추모사업회(1벌판 가득 고개 드는 들풀처럼 김수경 열사 추모집》, 127~128쪽


2013년 간담회에서 양돌규의 발제문 〈응답하라, 기억의 공동체〉에서도 인용되었던, 1990년 전교조와 참교육학부모회가 작성한 진상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2018년 현재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전교조의 방관자적 입장은 고등학생운동의 열사를 ‘전교조를 지키기 위해 운동하다가 목숨을 잃은 제자들’로 기억하는 한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열사들이 꿈꾸었고 실천했고 괴로워했던 운동과 현실을 다른 방향에서 조명하고 공감하는 운동 주체가 있어야만 다른 방식과 색깔의 추모 활동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청소년운동의 열사라는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고 싶다는 욕심을 품는다.


김수경 열사의 묘역에서 학교 현장에서 활동하다가 탄압을 받는 경험을 나누고, 학생회 활동을 포함하여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와 참정권 현실을 이야기하는 활동을 한다면 어떨까. 심광보 열사를 기리며 청소년 노동과 청소년 빈곤의 고단함에 대해 말하고, 여전히 학생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경쟁과 차별을 원리로 삼은 학교 현실을 비판한다면 어떨까. 청소년활동가들이 보성고의 김철수 열사 추모비와 광주 5.18 묘역을 방문하는 활동을 기획하고, “로보트 교육”에 반대하며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 김철수 열사의 소망을 곱씹고 교육 제도에 대해 토론하는 행사가 열린다면 어떨까. 해마다 6월 초면 초·중·고등학교들에서 김철수 열사와 김수경 열사에 대해 알리는 벽보가 게시판에 붙으면 어떨까. 나는 청소년운동이 추모 사업 주체들과 함께 앞으로 이런 기획과 실천을 함께하는 것을 꿈꾼다.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앞으로도 죽 그들이 교육과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운동을 하다가 학교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또는 더 나은 교육과 세상을 외치며 목숨을 바친 청소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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