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운동 입장에서 본 1991년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상임활동가
1991년 투쟁 속 고등학생운동
몇 년 전 광주 5.18 묘역에 있는 김철수 열사의 묘를 방문한 적이 있다. 김철수 열사 묘비 옆면에는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 유서 中”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30년 전 열사의 외침이었지만 바로 지금 청소년인권활동가의 말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나는 그 묘비를 마주하고 비로소 김철수 열사를 오래전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갔고 투쟁했던 청소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김철수 열사는 1990년 죽은 김수경, 심광보 열사와 함께 고등학생운동의 열사로 꼽힌다. 특히 김철수 열사는 1991년, 강경대 열사가 경찰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투쟁의 와중 분신한 이들 중 1명이다. 전남 보성고 학생이었던 김철수 열사는 1991년 유일한 ‘고등학생 열사’이다. 그런데 죽음 당시에 고등학생은 아니었으나 고등학생운동 출신의 열사들은 더 있다. 1991년 투쟁 초기 대학생 열사인 전남대 박승희(4월 29일 분신), 안동대 김영균(5월 1일 분신), 경원대 천세용(5월 3일 분신) 열사 모두 고등학생운동 경험자인 것이다. 이는 당시 분신으로 항거했던 학생 열사 전원이 고등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강경대의 죽음에 이어 이들의 죽음이 1991년 5월 투쟁을 격화시켰으며 이는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등 다른 노동자, 활동가 들의 분신 항거로 이어졌다.
고등학생운동은 1987년을 전후하여 조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운동이다. 1988~1989년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를 외치며 여러 중고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학생 자치권을 쟁취했다. 1989년 전교조 창립과 해직 사태를 맞이하여선 더욱 대중적인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후에는 참교육으로 대변된 교육 개혁 요구의 목소리로, 두발규제 철폐 투쟁, 보충수업 철폐 투쟁 등 학생인권과 학교 민주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반미·통일이나 노동해방 등 사회 변혁을 위한 각 노선별 활동으로 고등학생운동은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91년 투쟁 당시에는 고등학생운동 조직들이 조직적으로 대오를 꾸려 참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고등학생 정치활동 쟁취 공동실천위원회’는 18세 선거권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철수 열사의 죽음 이후 광주에서 고등학생들이 결의대회를 열고 ‘참교육선봉대’ 깃발을 들고 나선 모습은, 고등학생운동이 하나의 운동 세력으로 조직화되어 1991년 투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다.
비록 고등학생운동이 1991년 투쟁에서 수적으로 주를 이룬 것은 아니었더라도, 고등학생운동과 관련된 경험을 가진 세대와 그들의 문제의식은 당시 투쟁을 좌우했다. 가령 외대에서 학생들이 정원식 총리 임명자에게 계란과 밀가루와 오물 등을 던지며 항의한 사건은 전교조 해직 반대 투쟁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 또는 공통된 세대의 경험은 1991년 5월 투쟁의 국면이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6・3 외대 사태에서도 드러난다. 1989년 전교조 교사 1,500여 명의 해직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문교부 장관이던 정원식에 대한 외대 학생들의 항의와 계란, 밀가루 투척은 총학생회 지도부와는 관련이 없는 외대생들의 자발적인 ‘응징’이었다. 1989년 연인원 50만 명에 달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개인의 뇌리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양돌규(2002),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자율평론》3호.
이처럼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확대, 심화된 고등학생운동의 경험과 문제의식은 1991년의 대중 투쟁에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91년 5월 투쟁의 배경 중 하나로 전교조를 꼽는 해석 역시 실제로는 고등학생운동의 경험과 존재가 끼친 영향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등학생운동이 밑바탕에 있었다는 바로 그 부분이 1991년 투쟁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도, 청소년들이 정치적 주체로 나서서 내세운 이야기도, 교육과 사회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과 변혁에 대한 열망도 모두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승인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멈춘 지점
홍기빈은 발제문을 통해 “87년의 민주화운동은 91년 5월에 그렇게 끝이 났다.”라고 선고한다. 그러면서 그 원인으로 ‘지도부의 변절과 무능력’, ‘제도 정치로의 흡수로 귀결된 것’을 지목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1991년 투쟁이 애초부터 운동 지도부의 의도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세영은 《한겨레》 칼럼에서 1991년의 죽음 중 몇몇을 제외하면 “애도의 밀도는 성기고 지속기간도 짧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그 결행 주체 상당수가 하층노동자, 고교생, 무직자 등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또 다른 마이너리티의 죽음이 상쇄했고, 그 위에 가공된 음모와 부주의한 의심이 신속하게 덧칠됐다.”라고 지적했다. 바꿔 말해, 분신을 감행했던 주체를 포함하여 1991년 투쟁을 추동한 힘이 상당 부분 ‘사회적 마이너리티’에게서 나왔고 이들의 열망과 태도는 당시 투쟁 지도부와는 괴리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앞서 거론한 고등학생운동의 영향은 그러한 ‘차이’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1991년 투쟁의 기저에 있는 것은 결국 1987년의 민주주의가 멈춘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즉,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는데 아직 실질적 ‘민주’는 전혀 도래하지 않은 세상에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변화를 만들려 한 것이 열사들이었다. 고등학생들의 경우 대표적으로 체감하는 문제가 바로 학교 교육이었다. 1987년, 1989년 이후에도 민주주의는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참교육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전교조 교사들을 내쫓는 학교, 전혀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폭력적이고 경쟁적인 학교 현실이야말로, 김철수가 “이런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분신하고 ‘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드는 교육을 왜 받아야 합니까?’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잃게 만든 ‘배후’였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서 예외 취급받는 초·중·고 학생, 청소년들의 ‘정치적’ 삶도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아니, 민주주의의 바깥에 배제당하고 유예당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고등학생운동 주체들이 활동을 이유로 학교와 가정과 국가로부터 전면적이고 가혹한 탄압을 당하고 있었다. 1990년 학교 교사로부터 폭행과 언어폭력 등을 당한 뒤 투신한 김수경 열사의 사례는 고등학생운동 참여자들이 겪었던 고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1년 투쟁 무렵에도 교육청에서 ‘고교생 정신교육 강화 계획’이란 공문을 학교로 보내 학생들의 의식화를 막고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지도하라고 지시하는 등의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청소년들은 그 정치적 주체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운동을 하는 청소년은 불온한 사상에 세뇌당하고 선동, 조종당한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등 청소년 전반은 통제와 교육의 대상으로 위치 지워졌다.
이와 같은 청소년들에 대한 시선은 1991년 투쟁에서 고등학생운동과 청소년의 존재가 지워지는 데도 일조했다. 운동에 참여한 청소년들은 전교조나 대학생에 의해 의식화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운동 세력 안에서도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청소년들의 순수성을 강조하거나 조직적 고등학생운동을 가시화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게다가 1991년 투쟁 이후로 ‘어둠의 세력’, ‘유서 대필’ 운운하며 죽음을 선동하고 조종하는 배후 세력이 있다는 식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런 식의 공격은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인 청소년들, 고등학생운동에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정준희는 발제문에서 “처절한 저항적 행위였던 분신은 철없는 자기 파괴를 넘어 도구화된 죽음으로, 그리고 부당한 권력자에 대한 항의는 스승마저도 무자비하게 잡도리하는 무절제한 맹동으로 전치(轉置)되었다.”라고 논하며, 언론의 상징 권력 행사가 ‘스승을 폭행하는 제자’라는 이미지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한데 이런 상징 권력이 대중에게 충분히 먹혔던 것은, 그만큼 학교 교육과 나이주의 문화라는 영역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채 남아있던 시대상을 드러낸다. 정원식 총리 임명자가 문교부 장관으로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학생들이 시민으로서 총리 임명자에게 항의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원리도, ‘나이 많은 노교수가 어린 학생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장면에 압도당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해방의 정신보다도 나이주의와 권위주의, 군사부일체 등의 담론이 더욱 지배적이었기에 변혁운동의 주체인 학생들은 ‘패륜’으로 낙인찍혔다. 결국 1991년 투쟁은 1987년 민주화가 더 나아가지 못한 지점에서 시작되었고,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던 자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위축되고 잊혔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그리고 1987년에 대한 반성
김철수 열사의 묘역 앞에서 열사의 이야기를 듣고 비문을 읽으며, 왜 이런 열사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무지를 반성할 일이기도 하나,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1991년은 잘 조명받지 못했던 듯하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1991년의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지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 크다. 한편으로는 평가하고 기억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도 던지고 싶다.
1991년 투쟁 속의 고등학생운동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긴 했지만, 1991년에서 고등학생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열망과 운동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하던 공안정국과 경찰폭력, 물가 폭등이나 페놀 사건 등으로 인한 삶에 대한 위협, 그런 와중에 일어난 3당합당과 정치적 보수 반동 등은 이른바 ‘87년 체제’의 불철저한 민주화를 체감케 하고 있었다. 1991년 투쟁이 제기한 것은 어떤 문제였는지, 왜 당대에 승리하지 못했는지 살피는 것은 1987년과 ‘민주화’로 규정되는 역사/사회 인식을 반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라는 이념이 한계에 봉착하고 의문에 처하고 있는 지금 1991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홍기빈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그러한 재해석의 출발점은 바로 1991년 투쟁 속에서 어떤 주체들, 어떤 목소리들이 나왔는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가령 민주화되지 않는 학교 속에서 고등학생운동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참교육을 외쳤는지, 정원식 총리 임명자에게 야유하고 항의한 학생들은 왜 그럴 만하다고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는 왜 그러한 주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직면해야 한다. 과연 학교 교육은 그로부터 얼마나 변화했는지, 청소년들은 정치적 주체로 존중받고 있는지, 나이주의와 권위주의는 사라졌는지, 일터와 학교에도 민주주의가 뿌리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김철수 열사가 외친 ‘로보트 교육’에 대한 거부, 인간적인 교육과 사회를 바랐던 외침은 단지 ‘민주화’라는 제목하에 요약될 수 없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1991년은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누가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놓이는지,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존재가 지워지는지를 물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청소년운동 입장에서 본 1991년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상임활동가
1991년 투쟁 속 고등학생운동
몇 년 전 광주 5.18 묘역에 있는 김철수 열사의 묘를 방문한 적이 있다. 김철수 열사 묘비 옆면에는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가 인간적인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 유서 中”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30년 전 열사의 외침이었지만 바로 지금 청소년인권활동가의 말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나는 그 묘비를 마주하고 비로소 김철수 열사를 오래전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갔고 투쟁했던 청소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김철수 열사는 1990년 죽은 김수경, 심광보 열사와 함께 고등학생운동의 열사로 꼽힌다. 특히 김철수 열사는 1991년, 강경대 열사가 경찰폭력으로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투쟁의 와중 분신한 이들 중 1명이다. 전남 보성고 학생이었던 김철수 열사는 1991년 유일한 ‘고등학생 열사’이다. 그런데 죽음 당시에 고등학생은 아니었으나 고등학생운동 출신의 열사들은 더 있다. 1991년 투쟁 초기 대학생 열사인 전남대 박승희(4월 29일 분신), 안동대 김영균(5월 1일 분신), 경원대 천세용(5월 3일 분신) 열사 모두 고등학생운동 경험자인 것이다. 이는 당시 분신으로 항거했던 학생 열사 전원이 고등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강경대의 죽음에 이어 이들의 죽음이 1991년 5월 투쟁을 격화시켰으며 이는 김기설, 윤용하, 이정순 등 다른 노동자, 활동가 들의 분신 항거로 이어졌다.
고등학생운동은 1987년을 전후하여 조직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운동이다. 1988~1989년 “대통령부터 반장까지 직선제로”를 외치며 여러 중고교에서 학생회장 직선제, 자주적 학생회 투쟁으로 학생 자치권을 쟁취했다. 1989년 전교조 창립과 해직 사태를 맞이하여선 더욱 대중적인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후에는 참교육으로 대변된 교육 개혁 요구의 목소리로, 두발규제 철폐 투쟁, 보충수업 철폐 투쟁 등 학생인권과 학교 민주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반미·통일이나 노동해방 등 사회 변혁을 위한 각 노선별 활동으로 고등학생운동은 전개되었다.
그 결과 1991년 투쟁 당시에는 고등학생운동 조직들이 조직적으로 대오를 꾸려 참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고등학생 정치활동 쟁취 공동실천위원회’는 18세 선거권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김철수 열사의 죽음 이후 광주에서 고등학생들이 결의대회를 열고 ‘참교육선봉대’ 깃발을 들고 나선 모습은, 고등학생운동이 하나의 운동 세력으로 조직화되어 1991년 투쟁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다.
비록 고등학생운동이 1991년 투쟁에서 수적으로 주를 이룬 것은 아니었더라도, 고등학생운동과 관련된 경험을 가진 세대와 그들의 문제의식은 당시 투쟁을 좌우했다. 가령 외대에서 학생들이 정원식 총리 임명자에게 계란과 밀가루와 오물 등을 던지며 항의한 사건은 전교조 해직 반대 투쟁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 또는 공통된 세대의 경험은 1991년 5월 투쟁의 국면이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6・3 외대 사태에서도 드러난다. 1989년 전교조 교사 1,500여 명의 해직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문교부 장관이던 정원식에 대한 외대 학생들의 항의와 계란, 밀가루 투척은 총학생회 지도부와는 관련이 없는 외대생들의 자발적인 ‘응징’이었다. 1989년 연인원 50만 명에 달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개인의 뇌리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양돌규(2002),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자율평론》3호.
이처럼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확대, 심화된 고등학생운동의 경험과 문제의식은 1991년의 대중 투쟁에 여러 측면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91년 5월 투쟁의 배경 중 하나로 전교조를 꼽는 해석 역시 실제로는 고등학생운동의 경험과 존재가 끼친 영향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등학생운동이 밑바탕에 있었다는 바로 그 부분이 1991년 투쟁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도, 청소년들이 정치적 주체로 나서서 내세운 이야기도, 교육과 사회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과 변혁에 대한 열망도 모두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승인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할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멈춘 지점
홍기빈은 발제문을 통해 “87년의 민주화운동은 91년 5월에 그렇게 끝이 났다.”라고 선고한다. 그러면서 그 원인으로 ‘지도부의 변절과 무능력’, ‘제도 정치로의 흡수로 귀결된 것’을 지목한다. 이를 다른 관점에서 보면, 1991년 투쟁이 애초부터 운동 지도부의 의도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세영은 《한겨레》 칼럼에서 1991년의 죽음 중 몇몇을 제외하면 “애도의 밀도는 성기고 지속기간도 짧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 이유로 “그 결행 주체 상당수가 하층노동자, 고교생, 무직자 등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또 다른 마이너리티의 죽음이 상쇄했고, 그 위에 가공된 음모와 부주의한 의심이 신속하게 덧칠됐다.”라고 지적했다. 바꿔 말해, 분신을 감행했던 주체를 포함하여 1991년 투쟁을 추동한 힘이 상당 부분 ‘사회적 마이너리티’에게서 나왔고 이들의 열망과 태도는 당시 투쟁 지도부와는 괴리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앞서 거론한 고등학생운동의 영향은 그러한 ‘차이’의 일부인 것이다.
그리고 1991년 투쟁의 기저에 있는 것은 결국 1987년의 민주주의가 멈춘 지점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즉,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는데 아직 실질적 ‘민주’는 전혀 도래하지 않은 세상에서,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변화를 만들려 한 것이 열사들이었다. 고등학생들의 경우 대표적으로 체감하는 문제가 바로 학교 교육이었다. 1987년, 1989년 이후에도 민주주의는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참교육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전교조 교사들을 내쫓는 학교, 전혀 변화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폭력적이고 경쟁적인 학교 현실이야말로, 김철수가 “이런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분신하고 ‘학생들을 로보트로 만드는 교육을 왜 받아야 합니까?’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숨을 잃게 만든 ‘배후’였다.
시민적·정치적 권리에서 예외 취급받는 초·중·고 학생, 청소년들의 ‘정치적’ 삶도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아니, 민주주의의 바깥에 배제당하고 유예당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고등학생운동 주체들이 활동을 이유로 학교와 가정과 국가로부터 전면적이고 가혹한 탄압을 당하고 있었다. 1990년 학교 교사로부터 폭행과 언어폭력 등을 당한 뒤 투신한 김수경 열사의 사례는 고등학생운동 참여자들이 겪었던 고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991년 투쟁 무렵에도 교육청에서 ‘고교생 정신교육 강화 계획’이란 공문을 학교로 보내 학생들의 의식화를 막고 집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지도하라고 지시하는 등의 일이 버젓이 벌어졌다. 청소년들은 그 정치적 주체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운동을 하는 청소년은 불온한 사상에 세뇌당하고 선동, 조종당한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등 청소년 전반은 통제와 교육의 대상으로 위치 지워졌다.
이와 같은 청소년들에 대한 시선은 1991년 투쟁에서 고등학생운동과 청소년의 존재가 지워지는 데도 일조했다. 운동에 참여한 청소년들은 전교조나 대학생에 의해 의식화된 것으로 간주되었고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운동 세력 안에서도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청소년들의 순수성을 강조하거나 조직적 고등학생운동을 가시화하지 않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게다가 1991년 투쟁 이후로 ‘어둠의 세력’, ‘유서 대필’ 운운하며 죽음을 선동하고 조종하는 배후 세력이 있다는 식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런 식의 공격은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인 청소년들, 고등학생운동에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정준희는 발제문에서 “처절한 저항적 행위였던 분신은 철없는 자기 파괴를 넘어 도구화된 죽음으로, 그리고 부당한 권력자에 대한 항의는 스승마저도 무자비하게 잡도리하는 무절제한 맹동으로 전치(轉置)되었다.”라고 논하며, 언론의 상징 권력 행사가 ‘스승을 폭행하는 제자’라는 이미지로 완성되었다고 본다. 한데 이런 상징 권력이 대중에게 충분히 먹혔던 것은, 그만큼 학교 교육과 나이주의 문화라는 영역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채 남아있던 시대상을 드러낸다. 정원식 총리 임명자가 문교부 장관으로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평가도, 학생들이 시민으로서 총리 임명자에게 항의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원리도, ‘나이 많은 노교수가 어린 학생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장면에 압도당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해방의 정신보다도 나이주의와 권위주의, 군사부일체 등의 담론이 더욱 지배적이었기에 변혁운동의 주체인 학생들은 ‘패륜’으로 낙인찍혔다. 결국 1991년 투쟁은 1987년 민주화가 더 나아가지 못한 지점에서 시작되었고,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던 자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며 위축되고 잊혔다고 할 수 있다.
1991년 그리고 1987년에 대한 반성
김철수 열사의 묘역 앞에서 열사의 이야기를 듣고 비문을 읽으며, 왜 이런 열사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무지를 반성할 일이기도 하나, 학교에서도, 언론에서도 1991년은 잘 조명받지 못했던 듯하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가 1991년의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지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 크다. 한편으로는 평가하고 기억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도 던지고 싶다.
1991년 투쟁 속의 고등학생운동이라는 주제에 주목하긴 했지만, 1991년에서 고등학생운동만이 아니라 다른 다양한 열망과 운동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노조를 강경하게 탄압하던 공안정국과 경찰폭력, 물가 폭등이나 페놀 사건 등으로 인한 삶에 대한 위협, 그런 와중에 일어난 3당합당과 정치적 보수 반동 등은 이른바 ‘87년 체제’의 불철저한 민주화를 체감케 하고 있었다. 1991년 투쟁이 제기한 것은 어떤 문제였는지, 왜 당대에 승리하지 못했는지 살피는 것은 1987년과 ‘민주화’로 규정되는 역사/사회 인식을 반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민주화’라는 이념이 한계에 봉착하고 의문에 처하고 있는 지금 1991년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야 하는 홍기빈의 의견에 십분 동의한다.
그러한 재해석의 출발점은 바로 1991년 투쟁 속에서 어떤 주체들, 어떤 목소리들이 나왔는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가령 민주화되지 않는 학교 속에서 고등학생운동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참교육을 외쳤는지, 정원식 총리 임명자에게 야유하고 항의한 학생들은 왜 그럴 만하다고 느끼고 있었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는 왜 그러한 주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직면해야 한다. 과연 학교 교육은 그로부터 얼마나 변화했는지, 청소년들은 정치적 주체로 존중받고 있는지, 나이주의와 권위주의는 사라졌는지, 일터와 학교에도 민주주의가 뿌리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김철수 열사가 외친 ‘로보트 교육’에 대한 거부, 인간적인 교육과 사회를 바랐던 외침은 단지 ‘민주화’라는 제목하에 요약될 수 없다. 30년이 지난 오늘날, 1991년은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한국 사회에서 누가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에 놓이는지,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존재가 지워지는지를 물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