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자율평론 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양돌규
침묵의 소리(Sounds of Silence)
‘잊혀진’ 5월 투쟁. 그러나 역사에서 ‘잊혀진’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니 잊혀지기라도 하는 기억이라면 차라리 행복하다. 기억의 저장고에 한 번 들어가기라도 했었을 테니 말이다.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 보이지 않는 우무질 풍경. 역사는 너무 먼 곳에서 듣는 듯하다. 너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하다. 역사가 외면한 너무 많은 조각의 ‘사건’들이 ‘사건화’1)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과연 우리에게 과거가 존재했던 것일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일이 정말 일어난 적이 있었을까? 전투하듯 바위를 때리던 파도, 솔숲에 이는 바람, 이마를 때리던 빗줄기, 지랄탄 매캐한 연기 같던 구름, 아스팔트 도로에 날리던 유인물, 자연의 풍광은 그저 지나갈 뿐 역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기억이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런 것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한다. 나이테와 화석, 지층의 사이사이에는 지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몇 만 년, 몇 십만 년 전 어떤 종이 멸종했는지, 얼마나 많은 생명의 죽음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새겨 넣는다. 인간의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기억이 사실을 재구성하고 사실을 비틀며 생략과 삭제, 가감첨삭이 이루어진다. 많은 부분은 인식조차 못되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그랬을 때, 박살나 버린 SY-44 최루탄 조각 같은 그 기억의 편린들을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주워야 하나.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그래, 일어난 적은 있었다. 어디서 발견해 볼까? 디지털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신문이 말한다. 그런 일이 있기는 했었다고. 1991년 5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연일 시위가 벌어졌으며, 국무총리가 바뀌었다고.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구나.
하지만 이내 곧 좌불안석이 된다. 기억의 뿌리란 과거에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그 기억의 보증자가 1과 0으로 된 디지털이라니. 1과 0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디지털이 지시해주는 것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사고(accident) 뿐이다. 디지털 말고, 정녕 나와 기억을 나눌 빨갛게 더운 피 가진 이가 없단 말인가?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의 코기토가 불가능할 때, 그 사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어느 깊은 심해에서 파란 불꽃을 튕기며 살아내더라도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된다.
1991년 5월이 그랬다. 그건 ‘잊혀진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당대에 조차도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건은 벌어졌고 나는 그걸 안다. 내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에. 하지만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안다.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인정하는 것은 고작 실재론에 불과하다. 실재했었던 것이 곧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몇 천 년 전에 불었던 미풍처럼―그 바람 한 조각은 분명 호수에 잔잔한 파도를 만들어냈을 것이고 들꽃의 번식을 가능케 했었을 것이며 나뭇잎이 부비는 소리를 만들어냈을텐데―아무 것도 아닌 것, 나아가 있지도 않았던 것, 있었다 치더라도 도대체 무슨 상관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바람 한 조각을 어떻게 사건화시켜야 할까? 어떻게 역사화시켜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1991년 5월을 어떻게 사건화시킬 것인가? 우선 던져야 하는 질문, “1991년 5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5월 투쟁 연구
1991년 5월에 대한 연구는 결코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1991년 5월은 ‘발견’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의 일간 신문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거리에 뿌려진 막대한 양의 유인물이라든가, 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기억은 흩어졌고 잠복했다. 그러다가 1998년 김정한이 쓴 석사 논문이 책으로 출판되어 나오면서 1991년 5월은 비로소 ‘사건’이 되었다.2) 사실 1991년 5월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2종의 책이 출판된 적은 있었다.3) 하나는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범국민대책위의 주요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던 국민연합 사무처에서 펴낸 새로운 민중승리를 위하여라는 책4)이고, 또 하나는 김별아의 반자전적 소설인 개인적 체험이다.5) 앞의 책은 ‘공식 보고서’라는 의미에서 잊혀졌고, 뒤의 책은 ‘개인적 체험’이기 때문에 잊혀졌다. 지도부의 공식 언어로 ‘정리’된 책과 ‘지도부이자 대중의 1인’이 자기의 언어로 쓴 책. 두 책은 집단과 개인의 언어 차이이기도 하고 동시에 과학적 글쓰기와 내면적 글쓰기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 두 층위의 결합은 불가능한가?
어쨌든, 김정한의 책은 그 시절을 살아낸 많은 이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잊고 싶어했던 그 과거를 돌이켜보게 만들었다. <91년 5월 투쟁 청년모임>이라는 모임6)이 만들어졌고 두 차례의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고(2000년 11월 25일, 2001년 5월 12일) 그 결과가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7)
분신(焚身)의 의미화
김정한은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에서 “1991년 5월 투쟁의 진입로에서 벌어졌던 것은 지배세력의 ‘우발적’ 사건과 저항세력의 ‘필연적’ 사건의 대립, 즉 강경대 타살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강경대 타살 사건→제2의 6월 항쟁’이라는 의미 계열을 강하게 응고시킨 것은 4월 29일 박승희의 분신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정한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죽음-열사’라는 집단적 상징의 지평 위에서, 동시에 87년 6월 항쟁이라는 대중의 정치적 경험 위에서, 강경대의 죽음에 이어진 박승희의 분신은 대중의 봉기성을 촉발시키는 직접적인 호명이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의미가 계열화되는, 사건화의 과정이다.8)
조현연은 91년 당시 타살당한 이들과 분신한 이들 모두를 ‘희생’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특히 분신 사망한 이들의 죽음을 ‘강요된 자살’이란 말로 표현한다. 강요된 자살이란 자살은 자살이되, 자살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국가폭력과 암울한 시대상황 등 외적 요인에 의해 강요된 그런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강요된 자살에는 자기 몸을 불사르는 분신, 투신과 단식 등으로 인한 죽음 등 다양한 죽음의 형태들이 포함된다고 본다.9)
김정한은 “자기 희생을 통해 대중의 도덕적 분노, 힘의 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천”10)으로 보고 있고, 최장집은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배권력의 압도적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가장 치열한 무기”11)로 규정한다.
하승우는 “어찌보면 자살(부조리가 없었다면 계속 삶을 유지했을 생명이기 때문에 타살이기도 하다)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라는 줄리엣의 외침은 운명을 버텨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설사 자신의 존재가 소멸한다 하더라도 세상이 한순간에 뒤바뀔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런 의지를 통해 이 세상을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맞서고자 하는(그것이 자신의 소멸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존재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12)
유진홍은 서독 68과 한국의 91년 5월을 비교하면서, “정치적, 정세적으로 열세에 처한 저항 주체가 취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의 하나가 ‘도발 Provokation’”이라면서 한국의 91년 5월의 분신은 “국가의 압도적인 폭력이 전제된 상황에서 저항하는 주체가 그 폭력을 되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투여함으로써 ‘도발’을 실행한다. 즉, ‘분신’은 국민의 대다수가 국가폭력에 침묵하는 상황에서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행한 폭력의 원인을 묻고, ‘사회적 침묵의 카르텔’을 훼손하려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분신이라는 도발은 정세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고 “결국 ‘정권타도’를 외치는 분신의 행렬은 ‘정세의 고양’을 의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91년 5월 초기 침묵하는 여론에 대한 도발로서 ‘분신’이 갖는 효과는 극적이었지만, 계속적인 도발을 통해서 정세를 고양시켜 나아가려는 행위는 결국 저항하는 주체가 국가폭력을 압도하는 실제적인 ‘전복적 상황’이라기보다, 압도적인 국가폭력의 반응물이라는 현실적 힘의 관계를 드러”냈고, “결국 계속되는 도발은 대중이 그것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 역동적인 힘을 잃”었고, 오히려 “죽음과 폭력에 대한 대중의 양면적 태도에 직면했다”고 본다.13)
5월,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들
1991년 5월은 하나의 결절점이다.14)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일정하게 신군부에게 얻어낸 민주주의적 개혁의 성과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의 재집권으로 굴절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을 통한 정치적 재편을 통해 체제 내부를 안정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민중진영에 대한 폭력적 탄압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5공으로의 회귀로 ‘주관적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광주 학살을 딛고 집권한 신군부의 5공화국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운동 진영이 느낀 공포감은 이해될 수 있었다.
한편, 88학번부터 91학번까지의 5월 투쟁의 주력이었던 ‘현역’15) 대학생들은 그 이전 세대들과 일정하게 다른 경험을 가지고 성장했다. 이들은 80년 송출되기 시작한 컬러 공중파 방송을 보면서 유년기를 보냈고 80년대 초중반의 워크맨 열풍을 거치며 대중가요, 팝송을 들으며 자랐다. 이들에게 워크맨을 사줬던 이유는 영어회화가 강조되던 당시 중등교육의 분위기였는데, 이는 고등학교 시기 시작된 TV 과외 열풍을 타고 급속하게 보급된 비디오 기기로 이어졌다. 이들이 워크맨으로 영어회화를 익히고 비디오로 TV 과외를 녹화해 보기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진정 TV와 워크맨, 비디오로 세상을 만난 진정한 매스미디어 시대의 첫 세대라고 할 만하다.16) 6월 항쟁 이후의 일정하게 개방된 분위기 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억압적인 입시체제 하를 겪기는 했지만 신문, 잡지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넘쳐나는 정보들이 있었고 매우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PC 통신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17)
각자의 개인적 관심사가 있었고 꿈이 있었던 세대, 그러나 그들을 죄었던 것은 입시 체제였고 그러한 주체성과 학교 체제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자유’라는 슬로건이 그들에게 지향할 만한 유일한 가치였고, 그 자유를 향한 분출이 1987년 이후 고등학생운동의 출발이었다. 그 팽배한 욕망이 분출할 수 있도록 파열구를 열어젖힌 것은 1989년 이른바 전교조 사태였다.18) 교육체제를 ‘정상화’시키고자 하는 교사들의 욕망이 ‘참교육’으로 분출됐다면, 고등학생들의 요구는 그것을 다만 하나의 요소로 할 뿐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여겼던 참교육은 교육 ‘내용’과 관련하기보다는 교육의 ‘방식’과 결부된 것이었다. 전교조 당시의 고등학생들의 폭발적 힘의 분출은 올바른 내용을 가르치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지지였다기보다는 학생들을 풀어주던,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일정하게 자유를 주고 살인적인 입시체제에 숨통을 트여줬던,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수업과 자율학습 시간에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던 전교조 교사에 대한 지지였다. 다시 말해 자유와 결부되어 있었고 개인의 존엄을 지켜주던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운동은 그래서 입시교육체제 하에서의 학생들의 명백히 ‘자유의 확대’를 향한 방향에 맞춰져 있었고, 동아리와 모둠, 학생회(학생자치권) 등의 틈을 확보하고 신체적 자율권(두발제한··교복 폐지), 시간의 자율권(보충수업·자율학습 폐지)의 요구로 나아가고 있었다.19)
그러나 사실 입시교육 체제, 즉 학교라고 하는 울타리를 넘어서면 그들은 이미 일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기도 했다. 1987년 이후 소위 3저 호황을 겪으며 한국은 대중소비 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했으며, 대중매체를 통해 성장한 이들이 그러한 소비문화 시대로의 진입을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에게 대학은 해방구를 의미했고 무제한의 자유를 의미했다. 가정과 학교는 그 자유를 약속했다. 대학만 가라! 에덴동산으로의 탈출, 더 많은 자유. 물론 대학에는 층위가 있었고 학력고사를 치렀던 이들의 교실 뒷 칠판에는 서울대부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대학까지 모의고사 예상 진로표가 붙어 있었지만, 이들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명문대냐 아니냐라기보다는 합격이냐 불합격이냐의 문제였다. 대학에의 진학은 당장의 이 숨통 막히는 입시교육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학은 해방구였고 이들이 겪은 것은 무제한의 자유였을까? 이들이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대학에서 겪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세대, 이들은 학생회의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그것의 연합체 질서였던 전대협 세대였다. 학생회의 대중동원력은 1987년 6월부터 시작된 조직적 발전에 기초하고 있었다. 학생회운동이 학생운동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확대되고 있었고, 민중운동의 동원력은 아직 학생운동의 그것만큼 되지 못했다. 아울러 이 시기는 80년대의 특유의 엘리티즘과 지도에 대한 강박이 남아 있던 시대였다. 학생운동이 아직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는 강박이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에게는 있었고, 전대협은 그 과제를 기꺼이 자기 것으로 떠안았다. 88년 6·10, 8·15 남북학생회담, 11월 전두환·이순자 구속 투쟁, 89년 5월 지하철 파업, 전교조 사태, 8월 임수경 방북과 평양축전 참가투쟁,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범민족대회, 5・9 반민자당 투쟁, 91년 초 수서비리 규탄 투쟁 등에 이르기까지 전대협의 대중동원력이 뒷받침이 된 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동시에 민중진영에서는 노동, 농민, 도시빈민의 대중적 진출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었다. 민중연대를 통한 6월 항쟁의 재현, 그리하여 6월 항쟁의 과제가 완성되는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것은 학생운동 선배들에 의해 ‘학습이라는 형태로’ 이식되었고 이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자기화 했다. 하지만 많은 일상을 학생운동에 헌신했던 이들과는 달리, 그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현장으로의 투신(존재 이전)을 했던 그 이전 학번과는 달리 자기의 욕구, 꿈, 욕망은 결코 놓지 않았다. 당시를 풍미했던 대학 졸업 이후의 이른바 ‘애국적 사회진출’, ‘진보적 사회진출’은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20) 그 ‘사회진출 운동’은 개인적 욕구, 욕망과 운동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진출을 서로 견인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학번 모임이 졸업 이후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다. 그것은 이 세대가 자기 꿈, 욕구, 욕망이 아직 미완의 1987년에 결박당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박은 가령 학생운동의 경험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들은 학생운동의 일정, 캠 일정, 정세, 등에 무조건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 속에서 자유를 느끼지는 않았다. 김남주 시인의 ・자유・라는 싯구, 즉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를 외우기는 했지만 한편에서는 동아리, 학생회, 단체, 여러 형태의 조직에서 부자유를 느끼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계급적 한계라든가, 불철저성을 타박하고 자성하기도 했다. 이들의 부자유는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경험되었지만 명분이 없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떳떳하지 못했으며 스스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고 ‘정해진 회로’대로, ‘정해진 논리’대로 반성하기 일쑤였다.
1990년 3당 합당을 경유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폭력적인 대 민중운동 탄압이 개시되고, 이른바 공안정국 분위기는 이들에게 이 시기를 5공과 같은 폭압적인 상황으로 인식하게끔 했다. 1987년의 과제를 완수하느냐, 아니면 군부와 3당 야합체제를 용인하느냐로 여겨졌고, 따라서 전대협 지도부는 1987년의 연장선상 속에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야 했다.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은 이들에게 뇌관을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 그 직후 4월 29일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였던 전남대생 박승희의 분신은 5월 투쟁을 더욱 타오르게 만든 계기로 작용했다. 4월 26일 강경대의 죽음 직후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던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 앞에서는 당시 노태우 정권이 외국에서 수입한 대테러 진압 물대포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학생들이 있었고 이러한 며칠 간의 싸움은 투쟁의 주체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나 1987년 2・7, 3・3 투쟁으로 여겨졌다.21) 4월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제2차 국민대회는 바로 그러한 열기에 힘입어 5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다. 그 자리에서 전남대 박승희의 분신 소식이 전해졌고 그 소식은 연세대 운동장을 눈물과 울음 바다로 만들었다. 박승희의 분신은 이후 5・1 메이데이 집회 5・4 국민대회로 가는 일정 속에서 대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열기를 촉발시키는 촉매였고 이른바 ‘분신 정국’의 출발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박승희의 죽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 당시 정세를 급격하게 고양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22),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23),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24), 그리고 5월 18일 전남 보성고 김철수25), 네 명의 ‘분신 학생 열사’는 모두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 열사 6명 중, 경찰에 의해 타살되었던 강경대, 김귀정을 제외한 4명의 공통점은 단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운동을 경험했던 학생들의 분신이 당시 다른 노동자, 시민의 분신을 ‘촉발’시켰다는 사실은, 그리고 정세를 고양시켰다는 사실은 이들의 주체성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을 가지지 않았던 다른 학생들과 어떤 차이를 가졌는지에 관해 주목하도록 만든다. 이들은 87년 이후 고등학생이었고 고등학생으로서 생활하면서 수많은 열사의 할복, 투신, 분신 등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어떤 ‘호소’였다는 것, ‘촉발의 계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각자에게 ‘죽음’은 현실의 포기가 아니라 투쟁의 의미로 여겨졌음직 하다. 특히 이전 해였던 1990년 6월, 1972년 생의 대구 경화여고의 고등학생운동 활동가 김수경이 투신해서 죽었고26), 9월에는 같은 나이였던 충주의 심광보가 분신・투신했다.27) 이 죽음은 91년의 학생열사들에게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의 죽음으로 여겨졌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 또는 공통된 세대의 경험은 1991년 5월 투쟁의 국면이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6・3 외대 사태에서도 드러난다. 1989년 전교조 교사 1,500여 명의 해직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문교부 장관이던 정원식에 대한 외대 학생들의 항의와 계란, 밀가루 투척은 총학생회 지도부와는 관련이 없는 외대생들의 자발적인 ‘응징’이었다. 1989년 연인원 50만 명에 달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개인의 뇌리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28)
이러한 경험은 89년 당시 고등학생들의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친 싸움을 ‘지도’하고 ‘조직’하고자 했던 고등학생운동 활동가29)들에게 보다 강하게 각인 되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30) 고등학생운동과 대학생운동은 더 넓은 지평에서 운동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91년 5월 투쟁 당시의 광범한 대학생들과는 달랐다.31) 이들이 운동을 시작한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은 오히려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세대에 가까웠고 특히나 그 운동의 하위문화에 있어서는 더더욱 비슷했다. ‘개인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도 80년대의 아우라는 매우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히려 87년을 경험하지 못하고 91년을 경험했던 학생들, 고등학생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를 찾아 대학에 입학하고자 고등학교 3년을 기꺼이 유예시켰던 그 ‘문제의’ 88, 89, 90, 91학번은 대학에서의 학생운동 경험과 관계 없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산뜻하게’(?) 개인의 꿈, 욕망, 야심을 좇아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80년대의 아우라가 고등학생운동 출신 열사들의 삶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면, 이들 88, 89, 90, 91의 삶에는 열사들의 죽음, 91년 5월 투쟁의 그 끔찍한 아우라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비교적 산뜻하게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또 졸업과 동시에 ‘운동’으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졸업’(?)해 버리는 92학번 이후 세대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93년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세대는 1987년부터 91년까지의 한 순환을 겪은 전대협 세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32)
즉, 1987년까지의 소위 ‘진정한 386세대’, ‘80년대 학생운동권’이 80년 5월 광주의 죽음의 빚, 부채의식을 6월 항쟁을 통해 깨끗이 청산하고 개인적 출세와 영달의 길로 나아갔다고 한다면, 92학번 이후의 ‘진정한 90년대 학생운동권’은 부채의식도 없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대중소비문화의 시대에 급격히 흡수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중간에 끼어 있는 ‘91년 5월 세대’는 개인사적 성장의 경험과 세대적 공통점에 있어서 92학번 이후 세대와 유사하지만, 5월 투쟁 당시의 수많은 열사의 죽음, 그 피비린내 나던 싸움의 경험에 아직 결박당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 동기들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있다. 80년대의 막차를 탄 사람은 91학번이라고. 흔히 88, 89, 90학번은 80년대의 마지막 기차의 좌석을 차지했지만, 막차가 떠난 뒤에 쫓아 달려가서 기차의 후미를 잡아탄 학번이 91학번이라고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때의 뿌듯함과 서운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뒤 92학번은 플랫폼을 떠나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기차를 바라본 학번, 93학번은 92학번으로부터 ‘막차가 방금 떠났어, 기찻길을 따라가자’라는 말을 들었던 세대, 94, 95, 96 등은 점차 “여기가 플랫폼이었대”, “이곳이 기차역이었대”, “기차라는 게 있었다는군” 등의 오래된 신화를 구전받고 전해주던 학번이라는 것이었다.33)
강연후 저녁 뒷풀이에는 한림대의 진보적 교수들과 민주노총 강원본부 사람들이 함께 하였다. 민주노총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젊었는데 그 중에서 사무차장, 기획차장과 주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그들이 한림대 90학번과 91학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권대표를 수행하러 갔던 동료가 이런 말을 하였다. “거, 이상한데. 전국적으로 보면 90, 91학번 활동가가 제일 많은 것 같애.”... ‘왜일까? 왜, 운동이 더 활발했던 80년대 후반, 종반의 활동가보다 90년대 초반 학번의 활동가가 더 많을까?’ 동료의 말을 듣고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은 바로 이런 의문이었다.34)
다시 말해 보자. 91년 5월 투쟁은 하나의 결절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80년대 학생운동의 한 순환, 90년대 학생운동의 또 하나의 순환 사이에서 87년~91년까지의 6월 항쟁의 완수를 위해 싸웠던 한 순환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단절로부터 시작한 새로운 주체성을 드러내는 세대가 대학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2년 등장한 ‘신세대 담론’과 92학번에게 붙여졌던 ‘신세대’라는 레떼르는 ‘학생운동’과 결부되지 않은 최초의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신세대’의 등장은 1987년 6월 항쟁이 군부독재의 결정적 패퇴로 이어졌다면 88학번의 것이어야 했고 그 비슷한 표현이 88학번들에게 붙여졌던 ‘88 꿈나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88부터 91까지는 80년대만큼이나 격정적인 시대였고 급진적인 운동 세력과 군부, 보수세력과의 첨예한 투쟁이 진행되던 시대였다. 그 와중의 수많은 타살과 자살들은, 그리고 91년 5월의 결정적인 패배는 이들을 본격적인 세대로 등장시키는 것을 유예시켰다고 할 수 있다.
‘91년 5월 세대’는 하나의 막간극35)의 등장인물이었다. 그 막간극의 비극성은 다음 막에 시작될 희극을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90년대 학생운동의 희극성은 학생운동의 형해화, 레토릭, 급격한 소멸 등이 무대장치였다. 386이 6월 항쟁이라는 훈장으로 위로 받고 개인적 출세로 보상받고, 92학번 이후의 20대가 가볍고 산뜻한 보폭으로 자유를 만끽할 때, 이 막간극의 등장인물들은 무엇으로 위무(慰撫) 받을 수 있을 것인가.
2002년 7월 26~28일 작성한 초고
2002년 7월 28일 수정
2002년 10월 1일~2일 재수정
※ 미주
1) 사건, 사건화는 들뢰즈의 개념이다. 사고(accident)가 사물의 상태가 시공간적으로 유효화(effectuation)한 것이고 사실(fait)에 관한 범주라면, 반면 사건이란 어떤 사물의 상태나 사실을 다른 상태나 사실에 연관짓는, 그런 한에서 ‘관념적’ 성격이 개입된 범주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 어떤 사실을 ‘사건’으로서 포착하려는 질문. 이진경,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철학의 외부>, 2002, 186~187쪽.
2) 김정한, <대중과 폭력―91년 5월 투쟁에 대한 기억>, 이후 출판사, 1998. 이 책의 출판은 두 가지 의미에서의 사건이다. 하나는 1991년 5월 투쟁이 비로소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출판으로부터 시작된 1991년 5월에 대해 ‘기억해 내기’ 자체가 또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이다.
3) 그 외 기존 연구 문헌에 대해 아쉬운대로 김원이 정리해둔 목록을 참조할 만하다. 정성진, <87년 6월과 91년 6월의 성격 연구>, <캠퍼스 저널>, 1991년 7월; 최장집 <한국민주화의 실험, 5월투쟁, 광역지방의회선거, 현대사태>,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한길사, 1993; 최성혁, <눈물로 쓴 보고서, 1991년 봄>, 이웃, 1992. 또 당대의 학생운동 경험을 소설로 다룬 것으로는 김별아, <개인적 체험>, 실천문학사, 1999.; 김종광, <71년생 다인이>, 작가정신, 2002.를 참조할 것.
4) 국민연합 사무처 편, <새로운 시작 민중연대를 위하여>, 일송정, 1991.
5) 김별아, <개인적 체험>, 실천문학사, 1999. 김별아 소설의 제목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1964년작 표제에서 따온 것이다. 김별아와 겐자부로 사이에 그리고 두 소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1968년 생인 김별아와 1935년 생의 겐자부로 사이는 그 세월의 간극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어떻게 상관(相關)시킬 수 있을 것인가? 김별아는 왜 겐자부로의 표제를 제목으로 ‘채택’했을까?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수술 시켜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만들 것인가,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를 갈등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혹 6월 항쟁 이후의 한국에 메스를 갖다댈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80년대 끝물, 90년대 초반 학생운동 세대의 심정과 잇닿아 있는 것일까?
6) 현재 이 모임은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로 남아 있다.
http://www.freechal.com/beyonddeath
7) 91년 5월 투쟁 청년모임 펴냄,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 이후 출판사, 2002년. 아래에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로 하기로 한다.
8) 김정한, <권력은 주체를 슬프게 한다―91년 5월 투쟁 읽기>,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후 출판사, 2002. 48~49쪽.
9) 조현연, <한국의 국가폭력과 ‘잊혀진’ 91년 5월 투쟁>,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2002; 조현연,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와 ‘죽음의 정치’>, 이병천・이광일 편, <20세기 한국의 야만 2>, 일빛, 2001.
10) 김정한, <대중과 폭력>, 이후 출판사, 1998, 43쪽.
11) 최장집, 앞의 글, 43~44쪽.
12) 하승우, <알리바이, 죽음, 공간의 복원>,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2002, 182쪽.
13) 유진홍, <서독 68과 한국의 91년 5월 ― 폭력과 도발의 문제설정>,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후 출판사, 2002, 205~211쪽.
14) 이유경, '6・3 외대 사건'에 대한 언론의 '상징폭력화' 과정,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2002, 78쪽. “...... 좀 다른(?) 시대로 편입하는 과도기에 벌어진 투쟁...... 80년대와 90년대의 ’가교적 투쟁'의 의미......”; 김원, <80년대와 90년대의 결절점>.
15) 예비역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현역이고 88, 89, 90, 91학번이 그들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했던 ‘고학번’은 주로 군대를 갔다 온 남학생들이거나 휴학과 제적 등의 이유로 학교를 더 다니고 있던, 또는 의식적으로 후배들의 ‘지도’를 위해 학교에 남아 있던 남녀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이들 ‘현역’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이 있다면 그것은 87년 6월 항쟁을 경험했는가 하는 지점일 터이다.
16) 서태지뿐만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폭발한 한국의 인디 록(Independent Rock)의 인기에는 이들에 열광하는 1991년 이후의 대학생들,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조성관,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90년대의 인디 록을 돌아보며>, <모색> 3호, 갈무리, 2002.
17) 1991년 5월 투쟁 때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PC 통신 동호회의 깃발이 거리에 등장하기도 했다. 하이텔의 ‘바른 통신 모임’(바통모)의 깃발이 바로 그것이다.
18)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당국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갖고 노조결성을 주도한 교사들을 파면, 형사처벌키로 하고 6월 22일 노조결성을 주도한 54명을 모두 파면, 해임토록 15개 시도 교육위에 하달하는 한편 이들을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으로 사법처리키로 한다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1차 탈퇴시한을 7월 15일, 2차 탈퇴시한을 8월 1일로 정하고 집요하게 탈퇴를 종용한다. 이 같은 조처로 인해 9월초까지 1,519명의 교사들이 파면, 해임되고, 42명의 교사들이 구속된다. 전교조 사태와 뒤이은 고등학생들의 투쟁은 1986년 이후의 고등학생운동의 종합국면(conjuncture)이었다. 전국 250여 개교에서 연인원 50만 명 이상이 참여한 학생들의 투쟁은 초기 전교조 교사에 대한 엄호, 방어의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투쟁의 파고가 높아짐에 따라 학생자치권 등 자신들의 요구를 내걸기 시작했다. 이는 투쟁의 과정에서 학생 자치권의 문제로 발전했다. 국가의 탄압은 단지 전교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가해졌다. 기존의 운동 성과들(직선제 학생회, 축제, 동아리)을 무로 돌리기도 했으며 전국적으로 40여 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고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었던 광주 서석고 강위원 학생이 제적, 구속되기도 하였다.(1990년 1월 26일, <한겨레신문>) 광주에서는 2만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전교조 사수를 위한 국민대회에 참석하여 독자적인 대오를 형성하고 가두 시위를 전개했다. 징계 학우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학생들은 대중적인 투쟁을 벌였고 결국 징계 철회를 받아내었고(전남 옥과고, 서울 고척고) 서울 남서울상고 학생회장,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의장대행, 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부고협) 의장, 마산창원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마창고협) 의장이 서울 평민당사와 기독교회관에서 ‘구속학우 석방’, ‘학생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10여 일에 걸친 단식농성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9) 그것은 현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 5월, 중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벌인 ‘두발폐지반대서명운동’과 2001~2002년에 걸친 0교시 폐지, 자율학습 폐지 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20) <애국적 사회진출과 사무전문기술직노동운동>, 새벽을 여는 사람들 엮음, 청년세대, 1989. 이 책에서는 비록 운동과 자아의 통일을 강조하지만, 이 책이 줬던 효과는 ‘자신의 욕망대로 진로를 정할 수 있는 명분’을 줬다는 것 뿐이다. 이후 한총련에서 시도된 부문계열운동이라든가 하는 시도는 이제 캠퍼스에서 지나간 유산에 불과하다.
21) 김정한은 이렇게 말한다. “강경대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곧바로 겹쳐졌다”. 김정한, <권력은 주체를 슬프게 한다―91년 5월 투쟁 읽기>,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후 출판사, 2002, 48쪽.
22) ‘박승희 동지는 고교 재학 중 학생회장에 출마하였고, 전교조와 관련해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떴으며, 대학생활로 더욱 더 진지한 모습으로 운동을 고민해 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편, <살아서 만나리라―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1997, 319쪽.
23) “대학에 입학하던 무렵의 동지는 조숙한 신입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교육문제와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하면서 이미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성장하던 그였기에 선배들에게는 기특하면서도 어려운 후배로, 동기들에게는 믿음직한 동지로 옆에 있었다.”, http://www.man-history.org/man-show.php?num=86. “고 3이 되고 한창 입시준비에 적응해야 할 학기초에 대여섯의 친구가 만나 모임을 만들기로 하였고 학교 뒷산에 모여 결성을 추진했던 것이 ‘교육민주를 염원하는 학생 소모임 목마름’이었다...... 그렇게 결성한 ‘목마름’의 이름으로 4월 19일 한양대에서 있었던 4.19 집회에 처음으로 나갔더랬다. 돌과 화염병 사이로 뛰어 다니고 있는 중에 시위대 앞줄에서 돌을 던지고 있던 낯익은 옷차림의 아이를 보았다. ‘다려다솜’이라고 쓰여있는 하늘색 티는 분명 우리 학교의 아이였고 금새 영균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간선이었던 학생회를 1,000여 장의 유인물을 학교 내에 뿌리면서 학우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결국 직선제로 바꿔 내었고, 전교조가 들어서면서는 전교조 지지 서명운동을 벌여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까지의 짧은 시간에 전체 학생들 3분의 2정도의 서명을 받아 내는 집중력을 가졌었고(물론, 학생부 선생에게 서명용지와 함께 목마름 친구들의 수업시간을 빼앗겨야 했지만...), 학교의 유일한 전교조 선생님이며 영균이가 무척 믿고 따르던 나승인 선생님의 해직 후엔 선생님의 복직을 위해 학교는 물론, 주택가를 돌면서 만 여장 이상의 유인물을 돌리며 거리 곳곳에 항의 낙서를 남기기도 했고, 또 출근 투쟁을 벌이시는 나승인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몇몇의 친구는 서무과 직원과 심한 몸싸움을 벌여야 했고, 졸업식장에서는 교장의 훈화 중에 나승인 선생님을 연호하며 졸업식의 진행을 거부하고, 족벌 재단으로 불리던 학교의 졸업앨범에서 이사장의 사진을 찢어 버리는 일까지 여러 번 교무실에도 끌려가고(전경의 진압봉이 학교에서도 유효하다는 걸 그 때 알게 되고.....), 여러 가지 벽으로 나름의 좌절도 맛보면서 지낸 영균이와 우리들의 고 3시절은 너무나 짧았지만 서로의 믿음들은 한없이 깊었다고 부끄럼 없이 얘기할 수 있다. 그 때, 우리들의 고 3시절, 많은 어려움을 각오하고 시작한 ‘교육민주를 염원하는 학생 소모임 목마름’은 여섯 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열세 명으로 늘었고, 몰래 유인물을 같이 돌려주는 등 ‘같이 나서지는 못하지만 너희들을 믿는다’는 학우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우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고등학교 친구 손동주의 글,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자료실(http://cafe.daum.net/namhemin/)
24) “동북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 문제로 강제 퇴직하시는 동북고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사회 모순의 문제를 인식하였다.”
http://www.man-history.org/man-show.php?num=120 참조.
경원열사 추모연대회의(http://cafe.daum.net/kycyh/),
53동우회(http://cafe.daum.net/53family/) 참조.
25) “1991년, 5월 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할 때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를 치루던 도중 김철수 동지는 운동장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행사장으로 달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우리의 소원'을 친구들에게 불러 달라고 했다. 동지는 유서로 보이는 타고 남은 종이에 노태우 정권의 퇴진과 참교육 실천을 위해 기성세대의 깨달음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동지는 결국 분신 2주만인 6월 1일 운명하였다.”
http://www.man-history.org/man-show.php?num=128
26) 1990년 6월 5일 대구 경화여고 학생회 간부로 일하던 김수경 학생이 “불온 사상으로 학생들을 선동하고 전교조 교사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교사들의 상습적 구타와 폭언에 시달리다 경북 경산시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 김양은 16절지에 볼펜으로 쓴 이 글에서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우리학교는 학생이 다닐 학교가 못된다는 것을 느꼈다. 어렵더라도 학교를 잘 이끌어 가라”, “나의 죽음을 왜곡하지 말라”는 등의 내용을 적어 놓았다. 또한 김양이 뛰어내린 인문관 옥상에서는 “엄마 아빠 미안해요. 다시 태어난다면 자랑스런 딸이 될거예요”라는 내용의 부모에게 보내는 유서가 발견됐다. 1990년 6월 7일, 한겨레신문 ; 1998년 6월 18일 제212호 한겨레21 , 6월 7일 장례식은 학교측의 입장을 좇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추모제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영구차 앞에 드러누웠던 학생들을 학교측이 강제로 드러내기도 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이에 김수경 학우 추모제를 가졌다. 서울에서는 6월 29일, 청소년 언론운동체 우리소리, 한물결 청년회 중고등부,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 서울연합,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 서울연맹 주최로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에서 약 6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추모제를 가졌다. 이날 고등학생들은 성명서를 채택하고 ‘학생탄압 분쇄’, ‘참교육 실현’과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정원식 퇴진’을 주장했다.
27) 1990년 9월 7일 오후 2시 20분, 심광보(당시 17세)가 충주시 성서동 김윤택 치과의원 건물 3층 옥상에서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 서울 강동병원에서 투병 중 9월 8일 새벽 5시경에 운명하였다. 이에 KSCM 충주연맹은 “비록 우리는 열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열사가 무엇을 말했는지, 무엇을 외쳤는지...... 인간화 교육의 참교육을 약한 자가 주인되는 참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열사의 뜻을 쟁취해 나가야 합니다.”라는 성명을 냈고, 1990년 9월 10일 민주학생 고 심광보군 장례를 위한 시민 대책위원회에서도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편, 살아서 만나리라―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 1997, 305~307쪽.
28) 정원택, 기억2―외대 사건 ,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 이후, 2002, 102~103쪽. 당시 외국어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정원택의 증언이다. “당시 91년이었기 때문에, 전교조 사건이 89년도에 있었고, 90, 91학번들이 1, 2학년이었어요. 여전히 이 친구들한테는 [전교조 사건에 대한] 기억이 강렬히 남았던 걸로 생각하거든요. [정원식 총리를] 완전히 못 나가게 하고, 총학생회 간부들이 제발 밖으로 내보내자고 거의 호소를 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너는 뭐냐며... [우리가 정원식 총리를] 둘러싸고, 거의 뚫다시피 하고, 제가 총학생회장인데, 제발 나가게 하자고, 그런데 총학생회장에게도 너는 뭐냐는 분위기였어요...”
29) 이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은 ‘고운 활동가’였고, 따라서 고등학생 대중의 의식화, 조직화와 지도의 임무를 자신의 과제라고 인식했다.
30) 당시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졸업 이후의 진로는 공장 농촌 등의 노동현장으로의 투신, 그리고 대학으로의 진학이 자연스러웠다.
31) 박승희의 생활 태도에서 나타나는 철저함은 대학의 또래 집단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신 이후 그러한 생활 모습은 ‘열사’라는 이름 속에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 되었을 것이다. 즉, 이질감이 아니라 범상치 않은, 존경스러운, 모범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샴푸와 린스에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다고 비누로 머리를 감고 마지막 헹굴 때 식초 두세방울을 풀어 헹구라고 가르쳐주던, 하이타이도 퐁퐁도 콜라도 손 안대던 작은 애국자, 청소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편집실 식구, 친구들을 많이 생각하던 평범하고, 정 많았던 한 여대생...’,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편, 살아서 만나리라―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 1997, 319쪽.
32) 전대협과 한총련의 단절, 그 사이에 전대협의 마지막 의장이었던 태재준이 있다. 태재준은 고등학생운동의 초기 형성에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석관고에서 운동을 시작했고, 1991년 5월을 경험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한총련은 그와 같은 세대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태재준은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코드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석관고의 학내 민주화 사례는 다음을 참조. 김기화, 석관고등학교 학내민주화 사례 ― 학생회의 직선제 쟁취를 중심으로 , 민중교육 2호, 푸른나무, 1988.
33) 김종백, 90년대, 근대를 반성하며 다가서는 진정한 ‘근대’ , 관악문화 , 1999.
34) 김종철, ‘단절’과 ‘창조’의 시대 , 관악문화 , 1999.
35) 유진홍, 앞의 글, 196~197쪽.
2002년, 자율평론 3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1991년 5월 투쟁에 대한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양돌규
침묵의 소리(Sounds of Silence)
‘잊혀진’ 5월 투쟁. 그러나 역사에서 ‘잊혀진’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니 잊혀지기라도 하는 기억이라면 차라리 행복하다. 기억의 저장고에 한 번 들어가기라도 했었을 테니 말이다. 들리지 않는 침묵의 소리, 보이지 않는 우무질 풍경. 역사는 너무 먼 곳에서 듣는 듯하다. 너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하다. 역사가 외면한 너무 많은 조각의 ‘사건’들이 ‘사건화’1)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 과연 우리에게 과거가 존재했던 것일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일이 정말 일어난 적이 있었을까? 전투하듯 바위를 때리던 파도, 솔숲에 이는 바람, 이마를 때리던 빗줄기, 지랄탄 매캐한 연기 같던 구름, 아스팔트 도로에 날리던 유인물, 자연의 풍광은 그저 지나갈 뿐 역사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기억이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자연은 그런 것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한다. 나이테와 화석, 지층의 사이사이에는 지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몇 만 년, 몇 십만 년 전 어떤 종이 멸종했는지, 얼마나 많은 생명의 죽음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새겨 넣는다. 인간의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기억이 사실을 재구성하고 사실을 비틀며 생략과 삭제, 가감첨삭이 이루어진다. 많은 부분은 인식조차 못되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그랬을 때, 박살나 버린 SY-44 최루탄 조각 같은 그 기억의 편린들을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주워야 하나.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던가?
그래, 일어난 적은 있었다. 어디서 발견해 볼까? 디지털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신문이 말한다. 그런 일이 있기는 했었다고. 1991년 5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많이 죽고, 연일 시위가 벌어졌으며, 국무총리가 바뀌었다고.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구나.
하지만 이내 곧 좌불안석이 된다. 기억의 뿌리란 과거에 박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그 기억의 보증자가 1과 0으로 된 디지털이라니. 1과 0은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디지털이 지시해주는 것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사고(accident) 뿐이다. 디지털 말고, 정녕 나와 기억을 나눌 빨갛게 더운 피 가진 이가 없단 말인가? ‘나는 기억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나의 코기토가 불가능할 때, 그 사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어느 깊은 심해에서 파란 불꽃을 튕기며 살아내더라도 그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 된다.
1991년 5월이 그랬다. 그건 ‘잊혀진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당대에 조차도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사건은 벌어졌고 나는 그걸 안다. 내 경험의 일부이기 때문에. 하지만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안다. ‘의식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인정하는 것은 고작 실재론에 불과하다. 실재했었던 것이 곧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몇 천 년 전에 불었던 미풍처럼―그 바람 한 조각은 분명 호수에 잔잔한 파도를 만들어냈을 것이고 들꽃의 번식을 가능케 했었을 것이며 나뭇잎이 부비는 소리를 만들어냈을텐데―아무 것도 아닌 것, 나아가 있지도 않았던 것, 있었다 치더라도 도대체 무슨 상관인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 바람 한 조각을 어떻게 사건화시켜야 할까? 어떻게 역사화시켜야 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1991년 5월을 어떻게 사건화시킬 것인가? 우선 던져야 하는 질문, “1991년 5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5월 투쟁 연구
1991년 5월에 대한 연구는 결코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1991년 5월은 ‘발견’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의 일간 신문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 거리에 뿌려진 막대한 양의 유인물이라든가, 말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기억은 흩어졌고 잠복했다. 그러다가 1998년 김정한이 쓴 석사 논문이 책으로 출판되어 나오면서 1991년 5월은 비로소 ‘사건’이 되었다.2) 사실 1991년 5월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2종의 책이 출판된 적은 있었다.3) 하나는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범국민대책위의 주요 단체들이 포함되어 있던 국민연합 사무처에서 펴낸 새로운 민중승리를 위하여라는 책4)이고, 또 하나는 김별아의 반자전적 소설인 개인적 체험이다.5) 앞의 책은 ‘공식 보고서’라는 의미에서 잊혀졌고, 뒤의 책은 ‘개인적 체험’이기 때문에 잊혀졌다. 지도부의 공식 언어로 ‘정리’된 책과 ‘지도부이자 대중의 1인’이 자기의 언어로 쓴 책. 두 책은 집단과 개인의 언어 차이이기도 하고 동시에 과학적 글쓰기와 내면적 글쓰기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 두 층위의 결합은 불가능한가?
어쨌든, 김정한의 책은 그 시절을 살아낸 많은 이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잊고 싶어했던 그 과거를 돌이켜보게 만들었다. <91년 5월 투쟁 청년모임>이라는 모임6)이 만들어졌고 두 차례의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고(2000년 11월 25일, 2001년 5월 12일) 그 결과가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7)
분신(焚身)의 의미화
김정한은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에서 “1991년 5월 투쟁의 진입로에서 벌어졌던 것은 지배세력의 ‘우발적’ 사건과 저항세력의 ‘필연적’ 사건의 대립, 즉 강경대 타살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강경대 타살 사건→제2의 6월 항쟁’이라는 의미 계열을 강하게 응고시킨 것은 4월 29일 박승희의 분신이었다”고 주장한다. 김정한은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죽음-열사’라는 집단적 상징의 지평 위에서, 동시에 87년 6월 항쟁이라는 대중의 정치적 경험 위에서, 강경대의 죽음에 이어진 박승희의 분신은 대중의 봉기성을 촉발시키는 직접적인 호명이었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의미가 계열화되는, 사건화의 과정이다.8)
조현연은 91년 당시 타살당한 이들과 분신한 이들 모두를 ‘희생’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특히 분신 사망한 이들의 죽음을 ‘강요된 자살’이란 말로 표현한다. 강요된 자살이란 자살은 자살이되, 자살이라는 불가피한 선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국가폭력과 암울한 시대상황 등 외적 요인에 의해 강요된 그런 죽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 강요된 자살에는 자기 몸을 불사르는 분신, 투신과 단식 등으로 인한 죽음 등 다양한 죽음의 형태들이 포함된다고 본다.9)
김정한은 “자기 희생을 통해 대중의 도덕적 분노, 힘의 결집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실천”10)으로 보고 있고, 최장집은 “변화를 추구하는 강력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지배권력의 압도적 폭력성으로 인해 이를 실현할 수단을 갖지 못할 때, 약자가 최대한의 도덕적 힘을 발휘할 가장 치열한 무기”11)로 규정한다.
하승우는 “어찌보면 자살(부조리가 없었다면 계속 삶을 유지했을 생명이기 때문에 타살이기도 하다)은 부조리에 대항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든 게 끝장나도 내겐 아직 죽을 힘이 있어!”라는 줄리엣의 외침은 운명을 버텨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설사 자신의 존재가 소멸한다 하더라도 세상이 한순간에 뒤바뀔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지만, 그런 의지를 통해 이 세상을 수동적으로 살아가지 않고 능동적으로 맞서고자 하는(그것이 자신의 소멸을 가져온다 할지라도) 존재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12)
유진홍은 서독 68과 한국의 91년 5월을 비교하면서, “정치적, 정세적으로 열세에 처한 저항 주체가 취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의 하나가 ‘도발 Provokation’”이라면서 한국의 91년 5월의 분신은 “국가의 압도적인 폭력이 전제된 상황에서 저항하는 주체가 그 폭력을 되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투여함으로써 ‘도발’을 실행한다. 즉, ‘분신’은 국민의 대다수가 국가폭력에 침묵하는 상황에서 바로 자기 자신에게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행한 폭력의 원인을 묻고, ‘사회적 침묵의 카르텔’을 훼손하려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분신이라는 도발은 정세를 창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고 “결국 ‘정권타도’를 외치는 분신의 행렬은 ‘정세의 고양’을 의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91년 5월 초기 침묵하는 여론에 대한 도발로서 ‘분신’이 갖는 효과는 극적이었지만, 계속적인 도발을 통해서 정세를 고양시켜 나아가려는 행위는 결국 저항하는 주체가 국가폭력을 압도하는 실제적인 ‘전복적 상황’이라기보다, 압도적인 국가폭력의 반응물이라는 현실적 힘의 관계를 드러”냈고, “결국 계속되는 도발은 대중이 그것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 역동적인 힘을 잃”었고, 오히려 “죽음과 폭력에 대한 대중의 양면적 태도에 직면했다”고 본다.13)
5월, 세대론적 접근 : 그 세대들
1991년 5월은 하나의 결절점이다.14)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일정하게 신군부에게 얻어낸 민주주의적 개혁의 성과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의 재집권으로 굴절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을 통한 정치적 재편을 통해 체제 내부를 안정시켰고 다른 한편으로 민중진영에 대한 폭력적 탄압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5공으로의 회귀로 ‘주관적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광주 학살을 딛고 집권한 신군부의 5공화국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운동 진영이 느낀 공포감은 이해될 수 있었다.
한편, 88학번부터 91학번까지의 5월 투쟁의 주력이었던 ‘현역’15) 대학생들은 그 이전 세대들과 일정하게 다른 경험을 가지고 성장했다. 이들은 80년 송출되기 시작한 컬러 공중파 방송을 보면서 유년기를 보냈고 80년대 초중반의 워크맨 열풍을 거치며 대중가요, 팝송을 들으며 자랐다. 이들에게 워크맨을 사줬던 이유는 영어회화가 강조되던 당시 중등교육의 분위기였는데, 이는 고등학교 시기 시작된 TV 과외 열풍을 타고 급속하게 보급된 비디오 기기로 이어졌다. 이들이 워크맨으로 영어회화를 익히고 비디오로 TV 과외를 녹화해 보기만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들은 진정 TV와 워크맨, 비디오로 세상을 만난 진정한 매스미디어 시대의 첫 세대라고 할 만하다.16) 6월 항쟁 이후의 일정하게 개방된 분위기 하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억압적인 입시체제 하를 겪기는 했지만 신문, 잡지 시장의 확대와 더불어 넘쳐나는 정보들이 있었고 매우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PC 통신이 시작된 것도 이때였다.17)
각자의 개인적 관심사가 있었고 꿈이 있었던 세대, 그러나 그들을 죄었던 것은 입시 체제였고 그러한 주체성과 학교 체제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자유’라는 슬로건이 그들에게 지향할 만한 유일한 가치였고, 그 자유를 향한 분출이 1987년 이후 고등학생운동의 출발이었다. 그 팽배한 욕망이 분출할 수 있도록 파열구를 열어젖힌 것은 1989년 이른바 전교조 사태였다.18) 교육체제를 ‘정상화’시키고자 하는 교사들의 욕망이 ‘참교육’으로 분출됐다면, 고등학생들의 요구는 그것을 다만 하나의 요소로 할 뿐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여겼던 참교육은 교육 ‘내용’과 관련하기보다는 교육의 ‘방식’과 결부된 것이었다. 전교조 당시의 고등학생들의 폭발적 힘의 분출은 올바른 내용을 가르치는 전교조 교사에 대한 지지였다기보다는 학생들을 풀어주던,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일정하게 자유를 주고 살인적인 입시체제에 숨통을 트여줬던,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수업과 자율학습 시간에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던 전교조 교사에 대한 지지였다. 다시 말해 자유와 결부되어 있었고 개인의 존엄을 지켜주던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고등학생운동은 그래서 입시교육체제 하에서의 학생들의 명백히 ‘자유의 확대’를 향한 방향에 맞춰져 있었고, 동아리와 모둠, 학생회(학생자치권) 등의 틈을 확보하고 신체적 자율권(두발제한··교복 폐지), 시간의 자율권(보충수업·자율학습 폐지)의 요구로 나아가고 있었다.19)
그러나 사실 입시교육 체제, 즉 학교라고 하는 울타리를 넘어서면 그들은 이미 일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기도 했다. 1987년 이후 소위 3저 호황을 겪으며 한국은 대중소비 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했으며, 대중매체를 통해 성장한 이들이 그러한 소비문화 시대로의 진입을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에게 대학은 해방구를 의미했고 무제한의 자유를 의미했다. 가정과 학교는 그 자유를 약속했다. 대학만 가라! 에덴동산으로의 탈출, 더 많은 자유. 물론 대학에는 층위가 있었고 학력고사를 치렀던 이들의 교실 뒷 칠판에는 서울대부터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대학까지 모의고사 예상 진로표가 붙어 있었지만, 이들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명문대냐 아니냐라기보다는 합격이냐 불합격이냐의 문제였다. 대학에의 진학은 당장의 이 숨통 막히는 입시교육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대학은 해방구였고 이들이 겪은 것은 무제한의 자유였을까? 이들이 1988년부터 1991년까지 대학에서 겪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세대, 이들은 학생회의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그것의 연합체 질서였던 전대협 세대였다. 학생회의 대중동원력은 1987년 6월부터 시작된 조직적 발전에 기초하고 있었다. 학생회운동이 학생운동의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확대되고 있었고, 민중운동의 동원력은 아직 학생운동의 그것만큼 되지 못했다. 아울러 이 시기는 80년대의 특유의 엘리티즘과 지도에 대한 강박이 남아 있던 시대였다. 학생운동이 아직 시대를 선도해야 한다는 강박이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에게는 있었고, 전대협은 그 과제를 기꺼이 자기 것으로 떠안았다. 88년 6·10, 8·15 남북학생회담, 11월 전두환·이순자 구속 투쟁, 89년 5월 지하철 파업, 전교조 사태, 8월 임수경 방북과 평양축전 참가투쟁,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범민족대회, 5・9 반민자당 투쟁, 91년 초 수서비리 규탄 투쟁 등에 이르기까지 전대협의 대중동원력이 뒷받침이 된 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동시에 민중진영에서는 노동, 농민, 도시빈민의 대중적 진출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었다. 민중연대를 통한 6월 항쟁의 재현, 그리하여 6월 항쟁의 과제가 완성되는 것은 당시 학생운동의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것은 학생운동 선배들에 의해 ‘학습이라는 형태로’ 이식되었고 이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자기화 했다. 하지만 많은 일상을 학생운동에 헌신했던 이들과는 달리, 그리고 시대가 요구하는 현장으로의 투신(존재 이전)을 했던 그 이전 학번과는 달리 자기의 욕구, 꿈, 욕망은 결코 놓지 않았다. 당시를 풍미했던 대학 졸업 이후의 이른바 ‘애국적 사회진출’, ‘진보적 사회진출’은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20) 그 ‘사회진출 운동’은 개인적 욕구, 욕망과 운동을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진출을 서로 견인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학번 모임이 졸업 이후에도 만들어지고 유지되었다. 그것은 이 세대가 자기 꿈, 욕구, 욕망이 아직 미완의 1987년에 결박당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박은 가령 학생운동의 경험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들은 학생운동의 일정, 캠 일정, 정세, 등에 무조건 자신을 일치시키고 그 속에서 자유를 느끼지는 않았다. 김남주 시인의 ・자유・라는 싯구, 즉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를 외우기는 했지만 한편에서는 동아리, 학생회, 단체, 여러 형태의 조직에서 부자유를 느끼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계급적 한계라든가, 불철저성을 타박하고 자성하기도 했다. 이들의 부자유는 개인과 조직 사이에서 경험되었지만 명분이 없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떳떳하지 못했으며 스스로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라고 ‘정해진 회로’대로, ‘정해진 논리’대로 반성하기 일쑤였다.
1990년 3당 합당을 경유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폭력적인 대 민중운동 탄압이 개시되고, 이른바 공안정국 분위기는 이들에게 이 시기를 5공과 같은 폭압적인 상황으로 인식하게끔 했다. 1987년의 과제를 완수하느냐, 아니면 군부와 3당 야합체제를 용인하느냐로 여겨졌고, 따라서 전대협 지도부는 1987년의 연장선상 속에서 첨예한 대립각을 세워야 했다.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의 죽음은 이들에게 뇌관을 터뜨리는 것과 같았다. 그 직후 4월 29일 자신의 몸에 신나를 끼얹고 불을 붙였던 전남대생 박승희의 분신은 5월 투쟁을 더욱 타오르게 만든 계기로 작용했다. 4월 26일 강경대의 죽음 직후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던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 앞에서는 당시 노태우 정권이 외국에서 수입한 대테러 진압 물대포에 비폭력으로 맞서는 학생들이 있었고 이러한 며칠 간의 싸움은 투쟁의 주체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나 1987년 2・7, 3・3 투쟁으로 여겨졌다.21) 4월 29일 연세대에서 열린 제2차 국민대회는 바로 그러한 열기에 힘입어 5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치러졌다. 그 자리에서 전남대 박승희의 분신 소식이 전해졌고 그 소식은 연세대 운동장을 눈물과 울음 바다로 만들었다. 박승희의 분신은 이후 5・1 메이데이 집회 5・4 국민대회로 가는 일정 속에서 대중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고 열기를 촉발시키는 촉매였고 이른바 ‘분신 정국’의 출발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박승희의 죽음을 눈여겨 봐야 한다. 당시 정세를 급격하게 고양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4월 29일 전남대생 박승희22), 5월 1일 안동대 김영균23), 5월 3일 경원대 천세용24), 그리고 5월 18일 전남 보성고 김철수25), 네 명의 ‘분신 학생 열사’는 모두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 열사 6명 중, 경찰에 의해 타살되었던 강경대, 김귀정을 제외한 4명의 공통점은 단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운동을 경험했던 학생들의 분신이 당시 다른 노동자, 시민의 분신을 ‘촉발’시켰다는 사실은, 그리고 정세를 고양시켰다는 사실은 이들의 주체성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을 가지지 않았던 다른 학생들과 어떤 차이를 가졌는지에 관해 주목하도록 만든다. 이들은 87년 이후 고등학생이었고 고등학생으로서 생활하면서 수많은 열사의 할복, 투신, 분신 등을 목도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어떤 ‘호소’였다는 것, ‘촉발의 계기’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각자에게 ‘죽음’은 현실의 포기가 아니라 투쟁의 의미로 여겨졌음직 하다. 특히 이전 해였던 1990년 6월, 1972년 생의 대구 경화여고의 고등학생운동 활동가 김수경이 투신해서 죽었고26), 9월에는 같은 나이였던 충주의 심광보가 분신・투신했다.27) 이 죽음은 91년의 학생열사들에게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세대’의 죽음으로 여겨졌다.
고등학생운동의 경험, 또는 공통된 세대의 경험은 1991년 5월 투쟁의 국면이 결정적으로 전환되는 6・3 외대 사태에서도 드러난다. 1989년 전교조 교사 1,500여 명의 해직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문교부 장관이던 정원식에 대한 외대 학생들의 항의와 계란, 밀가루 투척은 총학생회 지도부와는 관련이 없는 외대생들의 자발적인 ‘응징’이었다. 1989년 연인원 50만 명에 달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그러한 경험은 개인의 뇌리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28)
이러한 경험은 89년 당시 고등학생들의 자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거친 싸움을 ‘지도’하고 ‘조직’하고자 했던 고등학생운동 활동가29)들에게 보다 강하게 각인 되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학생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30) 고등학생운동과 대학생운동은 더 넓은 지평에서 운동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91년 5월 투쟁 당시의 광범한 대학생들과는 달랐다.31) 이들이 운동을 시작한 시점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은 오히려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세대에 가까웠고 특히나 그 운동의 하위문화에 있어서는 더더욱 비슷했다. ‘개인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도 80년대의 아우라는 매우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히려 87년을 경험하지 못하고 91년을 경험했던 학생들, 고등학생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를 찾아 대학에 입학하고자 고등학교 3년을 기꺼이 유예시켰던 그 ‘문제의’ 88, 89, 90, 91학번은 대학에서의 학생운동 경험과 관계 없이 대학 졸업과 동시에 ‘산뜻하게’(?) 개인의 꿈, 욕망, 야심을 좇아 살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80년대의 아우라가 고등학생운동 출신 열사들의 삶에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면, 이들 88, 89, 90, 91의 삶에는 열사들의 죽음, 91년 5월 투쟁의 그 끔찍한 아우라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비교적 산뜻하게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또 졸업과 동시에 ‘운동’으로부터도 자연스럽게 ‘졸업’(?)해 버리는 92학번 이후 세대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93년 ‘생활・학문・투쟁의 공동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한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세대는 1987년부터 91년까지의 한 순환을 겪은 전대협 세대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32)
즉, 1987년까지의 소위 ‘진정한 386세대’, ‘80년대 학생운동권’이 80년 5월 광주의 죽음의 빚, 부채의식을 6월 항쟁을 통해 깨끗이 청산하고 개인적 출세와 영달의 길로 나아갔다고 한다면, 92학번 이후의 ‘진정한 90년대 학생운동권’은 부채의식도 없기 때문에 너무나 쉽게 대중소비문화의 시대에 급격히 흡수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중간에 끼어 있는 ‘91년 5월 세대’는 개인사적 성장의 경험과 세대적 공통점에 있어서 92학번 이후 세대와 유사하지만, 5월 투쟁 당시의 수많은 열사의 죽음, 그 피비린내 나던 싸움의 경험에 아직 결박당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듯하다.
오래전 동기들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있다. 80년대의 막차를 탄 사람은 91학번이라고. 흔히 88, 89, 90학번은 80년대의 마지막 기차의 좌석을 차지했지만, 막차가 떠난 뒤에 쫓아 달려가서 기차의 후미를 잡아탄 학번이 91학번이라고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때의 뿌듯함과 서운함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뒤 92학번은 플랫폼을 떠나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기차를 바라본 학번, 93학번은 92학번으로부터 ‘막차가 방금 떠났어, 기찻길을 따라가자’라는 말을 들었던 세대, 94, 95, 96 등은 점차 “여기가 플랫폼이었대”, “이곳이 기차역이었대”, “기차라는 게 있었다는군” 등의 오래된 신화를 구전받고 전해주던 학번이라는 것이었다.33)
강연후 저녁 뒷풀이에는 한림대의 진보적 교수들과 민주노총 강원본부 사람들이 함께 하였다. 민주노총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젊었는데 그 중에서 사무차장, 기획차장과 주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그들이 한림대 90학번과 91학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와 같이 권대표를 수행하러 갔던 동료가 이런 말을 하였다. “거, 이상한데. 전국적으로 보면 90, 91학번 활동가가 제일 많은 것 같애.”... ‘왜일까? 왜, 운동이 더 활발했던 80년대 후반, 종반의 활동가보다 90년대 초반 학번의 활동가가 더 많을까?’ 동료의 말을 듣고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은 바로 이런 의문이었다.34)
다시 말해 보자. 91년 5월 투쟁은 하나의 결절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80년대 학생운동의 한 순환, 90년대 학생운동의 또 하나의 순환 사이에서 87년~91년까지의 6월 항쟁의 완수를 위해 싸웠던 한 순환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단절로부터 시작한 새로운 주체성을 드러내는 세대가 대학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2년 등장한 ‘신세대 담론’과 92학번에게 붙여졌던 ‘신세대’라는 레떼르는 ‘학생운동’과 결부되지 않은 최초의 세대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신세대’의 등장은 1987년 6월 항쟁이 군부독재의 결정적 패퇴로 이어졌다면 88학번의 것이어야 했고 그 비슷한 표현이 88학번들에게 붙여졌던 ‘88 꿈나무’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88부터 91까지는 80년대만큼이나 격정적인 시대였고 급진적인 운동 세력과 군부, 보수세력과의 첨예한 투쟁이 진행되던 시대였다. 그 와중의 수많은 타살과 자살들은, 그리고 91년 5월의 결정적인 패배는 이들을 본격적인 세대로 등장시키는 것을 유예시켰다고 할 수 있다.
‘91년 5월 세대’는 하나의 막간극35)의 등장인물이었다. 그 막간극의 비극성은 다음 막에 시작될 희극을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었을까? 90년대 학생운동의 희극성은 학생운동의 형해화, 레토릭, 급격한 소멸 등이 무대장치였다. 386이 6월 항쟁이라는 훈장으로 위로 받고 개인적 출세로 보상받고, 92학번 이후의 20대가 가볍고 산뜻한 보폭으로 자유를 만끽할 때, 이 막간극의 등장인물들은 무엇으로 위무(慰撫) 받을 수 있을 것인가.
2002년 7월 26~28일 작성한 초고
2002년 7월 28일 수정
2002년 10월 1일~2일 재수정
※ 미주
1) 사건, 사건화는 들뢰즈의 개념이다. 사고(accident)가 사물의 상태가 시공간적으로 유효화(effectuation)한 것이고 사실(fait)에 관한 범주라면, 반면 사건이란 어떤 사물의 상태나 사실을 다른 상태나 사실에 연관짓는, 그런 한에서 ‘관념적’ 성격이 개입된 범주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 어떤 사실을 ‘사건’으로서 포착하려는 질문. 이진경,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철학의 외부>, 2002, 186~187쪽.
2) 김정한, <대중과 폭력―91년 5월 투쟁에 대한 기억>, 이후 출판사, 1998. 이 책의 출판은 두 가지 의미에서의 사건이다. 하나는 1991년 5월 투쟁이 비로소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출판으로부터 시작된 1991년 5월에 대해 ‘기억해 내기’ 자체가 또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이다.
3) 그 외 기존 연구 문헌에 대해 아쉬운대로 김원이 정리해둔 목록을 참조할 만하다. 정성진, <87년 6월과 91년 6월의 성격 연구>, <캠퍼스 저널>, 1991년 7월; 최장집 <한국민주화의 실험, 5월투쟁, 광역지방의회선거, 현대사태>,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한길사, 1993; 최성혁, <눈물로 쓴 보고서, 1991년 봄>, 이웃, 1992. 또 당대의 학생운동 경험을 소설로 다룬 것으로는 김별아, <개인적 체험>, 실천문학사, 1999.; 김종광, <71년생 다인이>, 작가정신, 2002.를 참조할 것.
4) 국민연합 사무처 편, <새로운 시작 민중연대를 위하여>, 일송정, 1991.
5) 김별아, <개인적 체험>, 실천문학사, 1999. 김별아 소설의 제목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1964년작 표제에서 따온 것이다. 김별아와 겐자부로 사이에 그리고 두 소설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 1968년 생인 김별아와 1935년 생의 겐자부로 사이는 그 세월의 간극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을 어떻게 상관(相關)시킬 수 있을 것인가? 김별아는 왜 겐자부로의 표제를 제목으로 ‘채택’했을까?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수술 시켜 평생 불구로 살아가게 만들 것인가,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를 갈등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혹 6월 항쟁 이후의 한국에 메스를 갖다댈 것인가 아닌가를 고민하는 80년대 끝물, 90년대 초반 학생운동 세대의 심정과 잇닿아 있는 것일까?
6) 현재 이 모임은 인터넷 상의 커뮤니티로 남아 있다.
http://www.freechal.com/beyonddeath
7) 91년 5월 투쟁 청년모임 펴냄,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 이후 출판사, 2002년. 아래에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로 하기로 한다.
8) 김정한, <권력은 주체를 슬프게 한다―91년 5월 투쟁 읽기>,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후 출판사, 2002. 48~49쪽.
9) 조현연, <한국의 국가폭력과 ‘잊혀진’ 91년 5월 투쟁>,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2002; 조현연,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와 ‘죽음의 정치’>, 이병천・이광일 편, <20세기 한국의 야만 2>, 일빛, 2001.
10) 김정한, <대중과 폭력>, 이후 출판사, 1998, 43쪽.
11) 최장집, 앞의 글, 43~44쪽.
12) 하승우, <알리바이, 죽음, 공간의 복원>,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2002, 182쪽.
13) 유진홍, <서독 68과 한국의 91년 5월 ― 폭력과 도발의 문제설정>,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후 출판사, 2002, 205~211쪽.
14) 이유경, '6・3 외대 사건'에 대한 언론의 '상징폭력화' 과정,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2002, 78쪽. “...... 좀 다른(?) 시대로 편입하는 과도기에 벌어진 투쟁...... 80년대와 90년대의 ’가교적 투쟁'의 의미......”; 김원, <80년대와 90년대의 결절점>.
15) 예비역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현역이고 88, 89, 90, 91학번이 그들이다. 당시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구성했던 ‘고학번’은 주로 군대를 갔다 온 남학생들이거나 휴학과 제적 등의 이유로 학교를 더 다니고 있던, 또는 의식적으로 후배들의 ‘지도’를 위해 학교에 남아 있던 남녀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이들 ‘현역’과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이 있다면 그것은 87년 6월 항쟁을 경험했는가 하는 지점일 터이다.
16) 서태지뿐만 아니라 90년대 중반 이후 폭발한 한국의 인디 록(Independent Rock)의 인기에는 이들에 열광하는 1991년 이후의 대학생들,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조성관,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90년대의 인디 록을 돌아보며>, <모색> 3호, 갈무리, 2002.
17) 1991년 5월 투쟁 때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PC 통신 동호회의 깃발이 거리에 등장하기도 했다. 하이텔의 ‘바른 통신 모임’(바통모)의 깃발이 바로 그것이다.
18)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결성되자 당국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갖고 노조결성을 주도한 교사들을 파면, 형사처벌키로 하고 6월 22일 노조결성을 주도한 54명을 모두 파면, 해임토록 15개 시도 교육위에 하달하는 한편 이들을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으로 사법처리키로 한다고 밝혔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1차 탈퇴시한을 7월 15일, 2차 탈퇴시한을 8월 1일로 정하고 집요하게 탈퇴를 종용한다. 이 같은 조처로 인해 9월초까지 1,519명의 교사들이 파면, 해임되고, 42명의 교사들이 구속된다. 전교조 사태와 뒤이은 고등학생들의 투쟁은 1986년 이후의 고등학생운동의 종합국면(conjuncture)이었다. 전국 250여 개교에서 연인원 50만 명 이상이 참여한 학생들의 투쟁은 초기 전교조 교사에 대한 엄호, 방어의 차원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투쟁의 파고가 높아짐에 따라 학생자치권 등 자신들의 요구를 내걸기 시작했다. 이는 투쟁의 과정에서 학생 자치권의 문제로 발전했다. 국가의 탄압은 단지 전교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운동에 대해서도 가해졌다. 기존의 운동 성과들(직선제 학생회, 축제, 동아리)을 무로 돌리기도 했으며 전국적으로 40여 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고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이었던 광주 서석고 강위원 학생이 제적, 구속되기도 하였다.(1990년 1월 26일, <한겨레신문>) 광주에서는 2만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전교조 사수를 위한 국민대회에 참석하여 독자적인 대오를 형성하고 가두 시위를 전개했다. 징계 학우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학생들은 대중적인 투쟁을 벌였고 결국 징계 철회를 받아내었고(전남 옥과고, 서울 고척고) 서울 남서울상고 학생회장,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의장대행, 부산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부고협) 의장, 마산창원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마창고협) 의장이 서울 평민당사와 기독교회관에서 ‘구속학우 석방’, ‘학생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10여 일에 걸친 단식농성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19) 그것은 현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0년 5월, 중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벌인 ‘두발폐지반대서명운동’과 2001~2002년에 걸친 0교시 폐지, 자율학습 폐지 운동 등이 바로 그것이다.
20) <애국적 사회진출과 사무전문기술직노동운동>, 새벽을 여는 사람들 엮음, 청년세대, 1989. 이 책에서는 비록 운동과 자아의 통일을 강조하지만, 이 책이 줬던 효과는 ‘자신의 욕망대로 진로를 정할 수 있는 명분’을 줬다는 것 뿐이다. 이후 한총련에서 시도된 부문계열운동이라든가 하는 시도는 이제 캠퍼스에서 지나간 유산에 불과하다.
21) 김정한은 이렇게 말한다. “강경대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과 곧바로 겹쳐졌다”. 김정한, <권력은 주체를 슬프게 한다―91년 5월 투쟁 읽기>,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후 출판사, 2002, 48쪽.
22) ‘박승희 동지는 고교 재학 중 학생회장에 출마하였고, 전교조와 관련해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떴으며, 대학생활로 더욱 더 진지한 모습으로 운동을 고민해 왔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편, <살아서 만나리라―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1997, 319쪽.
23) “대학에 입학하던 무렵의 동지는 조숙한 신입생이었다. 고등학교 때 교육문제와 사회문제를 고민하는 소모임 '목마름'에서 활동하면서 이미 치열한 고민 속에서 성장하던 그였기에 선배들에게는 기특하면서도 어려운 후배로, 동기들에게는 믿음직한 동지로 옆에 있었다.”, http://www.man-history.org/man-show.php?num=86. “고 3이 되고 한창 입시준비에 적응해야 할 학기초에 대여섯의 친구가 만나 모임을 만들기로 하였고 학교 뒷산에 모여 결성을 추진했던 것이 ‘교육민주를 염원하는 학생 소모임 목마름’이었다...... 그렇게 결성한 ‘목마름’의 이름으로 4월 19일 한양대에서 있었던 4.19 집회에 처음으로 나갔더랬다. 돌과 화염병 사이로 뛰어 다니고 있는 중에 시위대 앞줄에서 돌을 던지고 있던 낯익은 옷차림의 아이를 보았다. ‘다려다솜’이라고 쓰여있는 하늘색 티는 분명 우리 학교의 아이였고 금새 영균이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간선이었던 학생회를 1,000여 장의 유인물을 학교 내에 뿌리면서 학우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고 결국 직선제로 바꿔 내었고, 전교조가 들어서면서는 전교조 지지 서명운동을 벌여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까지의 짧은 시간에 전체 학생들 3분의 2정도의 서명을 받아 내는 집중력을 가졌었고(물론, 학생부 선생에게 서명용지와 함께 목마름 친구들의 수업시간을 빼앗겨야 했지만...), 학교의 유일한 전교조 선생님이며 영균이가 무척 믿고 따르던 나승인 선생님의 해직 후엔 선생님의 복직을 위해 학교는 물론, 주택가를 돌면서 만 여장 이상의 유인물을 돌리며 거리 곳곳에 항의 낙서를 남기기도 했고, 또 출근 투쟁을 벌이시는 나승인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몇몇의 친구는 서무과 직원과 심한 몸싸움을 벌여야 했고, 졸업식장에서는 교장의 훈화 중에 나승인 선생님을 연호하며 졸업식의 진행을 거부하고, 족벌 재단으로 불리던 학교의 졸업앨범에서 이사장의 사진을 찢어 버리는 일까지 여러 번 교무실에도 끌려가고(전경의 진압봉이 학교에서도 유효하다는 걸 그 때 알게 되고.....), 여러 가지 벽으로 나름의 좌절도 맛보면서 지낸 영균이와 우리들의 고 3시절은 너무나 짧았지만 서로의 믿음들은 한없이 깊었다고 부끄럼 없이 얘기할 수 있다. 그 때, 우리들의 고 3시절, 많은 어려움을 각오하고 시작한 ‘교육민주를 염원하는 학생 소모임 목마름’은 여섯 명의 회원으로 시작해 열세 명으로 늘었고, 몰래 유인물을 같이 돌려주는 등 ‘같이 나서지는 못하지만 너희들을 믿는다’는 학우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우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고등학교 친구 손동주의 글, 김영균 열사 추모사업회 자료실(http://cafe.daum.net/namhemin/)
24) “동북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 문제로 강제 퇴직하시는 동북고 선생님들의 모습에서 사회 모순의 문제를 인식하였다.”
http://www.man-history.org/man-show.php?num=120 참조.
경원열사 추모연대회의(http://cafe.daum.net/kycyh/),
53동우회(http://cafe.daum.net/53family/) 참조.
25) “1991년, 5월 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할 때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를 치루던 도중 김철수 동지는 운동장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행사장으로 달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우리의 소원'을 친구들에게 불러 달라고 했다. 동지는 유서로 보이는 타고 남은 종이에 노태우 정권의 퇴진과 참교육 실천을 위해 기성세대의 깨달음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동지는 결국 분신 2주만인 6월 1일 운명하였다.”
http://www.man-history.org/man-show.php?num=128
26) 1990년 6월 5일 대구 경화여고 학생회 간부로 일하던 김수경 학생이 “불온 사상으로 학생들을 선동하고 전교조 교사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교사들의 상습적 구타와 폭언에 시달리다 경북 경산시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 김양은 16절지에 볼펜으로 쓴 이 글에서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겠다. 우리학교는 학생이 다닐 학교가 못된다는 것을 느꼈다. 어렵더라도 학교를 잘 이끌어 가라”, “나의 죽음을 왜곡하지 말라”는 등의 내용을 적어 놓았다. 또한 김양이 뛰어내린 인문관 옥상에서는 “엄마 아빠 미안해요. 다시 태어난다면 자랑스런 딸이 될거예요”라는 내용의 부모에게 보내는 유서가 발견됐다. 1990년 6월 7일, 한겨레신문 ; 1998년 6월 18일 제212호 한겨레21 , 6월 7일 장례식은 학교측의 입장을 좇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추모제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영구차 앞에 드러누웠던 학생들을 학교측이 강제로 드러내기도 했다. 전국 각 지역에서는 이에 김수경 학우 추모제를 가졌다. 서울에서는 6월 29일, 청소년 언론운동체 우리소리, 한물결 청년회 중고등부, 흥사단 고등학생 아카데미 서울연합, 한국고등학생기독교운동 서울연맹 주최로 종로 5가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에서 약 600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추모제를 가졌다. 이날 고등학생들은 성명서를 채택하고 ‘학생탄압 분쇄’, ‘참교육 실현’과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정원식 퇴진’을 주장했다.
27) 1990년 9월 7일 오후 2시 20분, 심광보(당시 17세)가 충주시 성서동 김윤택 치과의원 건물 3층 옥상에서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 서울 강동병원에서 투병 중 9월 8일 새벽 5시경에 운명하였다. 이에 KSCM 충주연맹은 “비록 우리는 열사를 보냈지만 우리는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열사가 무엇을 말했는지, 무엇을 외쳤는지...... 인간화 교육의 참교육을 약한 자가 주인되는 참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열사의 뜻을 쟁취해 나가야 합니다.”라는 성명을 냈고, 1990년 9월 10일 민주학생 고 심광보군 장례를 위한 시민 대책위원회에서도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편, 살아서 만나리라―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 1997, 305~307쪽.
28) 정원택, 기억2―외대 사건 ,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 이후, 2002, 102~103쪽. 당시 외국어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정원택의 증언이다. “당시 91년이었기 때문에, 전교조 사건이 89년도에 있었고, 90, 91학번들이 1, 2학년이었어요. 여전히 이 친구들한테는 [전교조 사건에 대한] 기억이 강렬히 남았던 걸로 생각하거든요. [정원식 총리를] 완전히 못 나가게 하고, 총학생회 간부들이 제발 밖으로 내보내자고 거의 호소를 하기도 했는데, 오히려 너는 뭐냐며... [우리가 정원식 총리를] 둘러싸고, 거의 뚫다시피 하고, 제가 총학생회장인데, 제발 나가게 하자고, 그런데 총학생회장에게도 너는 뭐냐는 분위기였어요...”
29) 이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은 ‘고운 활동가’였고, 따라서 고등학생 대중의 의식화, 조직화와 지도의 임무를 자신의 과제라고 인식했다.
30) 당시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의 졸업 이후의 진로는 공장 농촌 등의 노동현장으로의 투신, 그리고 대학으로의 진학이 자연스러웠다.
31) 박승희의 생활 태도에서 나타나는 철저함은 대학의 또래 집단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신 이후 그러한 생활 모습은 ‘열사’라는 이름 속에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 되었을 것이다. 즉, 이질감이 아니라 범상치 않은, 존경스러운, 모범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샴푸와 린스에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다고 비누로 머리를 감고 마지막 헹굴 때 식초 두세방울을 풀어 헹구라고 가르쳐주던, 하이타이도 퐁퐁도 콜라도 손 안대던 작은 애국자, 청소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고 편집실 식구, 친구들을 많이 생각하던 평범하고, 정 많았던 한 여대생...’,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민족민주열사 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편, 살아서 만나리라―민족 민주열사 희생자 자료집 , 1997, 319쪽.
32) 전대협과 한총련의 단절, 그 사이에 전대협의 마지막 의장이었던 태재준이 있다. 태재준은 고등학생운동의 초기 형성에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던 석관고에서 운동을 시작했고, 1991년 5월을 경험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한총련은 그와 같은 세대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고 태재준은 그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코드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석관고의 학내 민주화 사례는 다음을 참조. 김기화, 석관고등학교 학내민주화 사례 ― 학생회의 직선제 쟁취를 중심으로 , 민중교육 2호, 푸른나무, 1988.
33) 김종백, 90년대, 근대를 반성하며 다가서는 진정한 ‘근대’ , 관악문화 , 1999.
34) 김종철, ‘단절’과 ‘창조’의 시대 , 관악문화 , 1999.
35) 유진홍, 앞의 글, 196~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