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5월 5일, 위로하고 분노하는 우리들의 어린이날! 학교 체벌 생존자 위로회를 진행했습니다!

관리자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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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5일, 지음에서는 ‘학교 체벌 생존자 위로회’를 진행했습니다. ‘변화의 월담’과 함께 바디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몸에 기억되어있던 체벌의 경험을 재발견하거나, 떨치거나, 나누었습니다. 경상권, 전라권, 수도권 등 전국에서 신청해 주셨고, 총 19명이 참여했습니다.

2023년 지음에서 “체벌은 국가폭력이다 - 국가가 조장한 체벌, 국가에 사과받자”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체벌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 해소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학교 체벌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문제에 더 주목하고자 했습니다. 

올해 어린이날을 맞아, 어리고 어렸던 우리들의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체벌을 겪었던, 겪고 있는 분들을 만나 함께 위로하고 분노하자는 취지를 담아 이번 위로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비를 뚫고 참여해 주신 여러분들, 

공간을 흔쾌히 내어주신 부산인권플랫폼 파랑, 

십시일반 모금에 동참해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아래는 참여해 주신 분들이 직접 적은 소감을 나눕니다.


● 발로 손을 꽉 쥐어보는 감각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발에 힘이 있다는 것이 좀 더 와닿았다. 눈을 감고 균형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눈을 감을 수록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균형을 놓칠까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공이라는 매개가 있을 때 좀 더 자유로워지는 몸을 감각하기도 했다. 나의 몸을 함부로 만지고 때렸던 순간의 경험들이 나에게 꼭 필요한 환대와 다정한 접촉들을 가로막게 한다. 타인과 몸을 접촉하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를 감각할 때 조금은 허물어지고 울 것만 같다.


● 정말 힘들었을 때, 내 두 어깨로 모든걸 감당해야만 했을 때, 항상 몸을 털고 한숨을 쉬고 땀 흘리며 스텝을 밟았을 때, 그리고 친구들과 그 시간을 함께 보냈을 때 지금처럼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다. 학교에서 조그만 실수도 그들에게 빌미가 될 수 있다는 긴장감이 계속 몸을 굳게 한다. 다만 학생들과 포옹하고, 운동하고, 동료와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나를 버티게 한다. 같이 땀 흘리고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아지길 바란다.


● 태어나서 이렇게 오래 발을 만져본 건 처음이었다. 내 발보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사진을 더 많이 봤다는 것을 깨달음. 공은 영감일 뿐 잡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진짜 충격적이었다. 정답이 있는 교육, 통제에 따라야 하는 학교, 입시경쟁교육을 반대한다고 자주 이야기 했지만 그것을 몸의 움직임과 연결시키진 못했다. 학교의 체육수업도 모두 다 정답이 있고, 입시경쟁교육이었다. 그 반대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함께 읽은 글에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하루 4번, 성장하기 위해 하루 12번의 포옹이 필요하다는 말은 “돌봄"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했다. 자라는 시기의 사람은 많은 포옹이 필요하다. 식사 후 트림도, 이동도 안겨서 하니까. 하지만 포옹은 함께 안는 쌍방향의 행위. 베푸는 돌봄이 아닌 상호돌봄에 대한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감각, 감정, 느낌에 대해 깨닫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내가 내 감정을 계속 지나치고 억누르면 결국 감정을 아예 못 느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마음, 느낌, 생각을 있는 그대로 몸짓이나 말 등의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움. 그런데 체벌은 폭력, 권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했던 것 같다. 동시에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내 느낌은 무엇인지 신경쓰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나’다움을 제한하는 것은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체벌에 맞서고, 체제에 맞서는 일은 결국 내 몸의 감각을 내 마음과 동등히 위치시켜, 감각까지 억눌러지지 않도록 오늘 우리가 한 것처럼 해방시키는 거 아닐까?


●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는 게 아니면 몸을 가만히 두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학교 다닐 때나 어릴 때 가만히 있지 않으면 혼내던 비청소년(양육자, 교사)들이 생각났다. 양말을 신지 않으면 복장을 제대로 갖추기 않는 것이라 여기는데, 더러워진 발도 더러워진 손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던 게임들은 항상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들이었는데(게임을 이기려고 하는 게 일반적인 인식 같기도 하지만) 그건 정말 놀이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진 사람들을 맞거나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받는 게 당연했는데, 그런 경험들이 체화되어서 자꾸 ‘상대의 날개뼈에 더 닿아 봐야지', ‘더 다양하게 젠가 블럭을 잡아 봐야지'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중간에 젠가를 하다가 ‘젠가가 가까이 있어도 문제 없는데 왜 이상하게 느껴질까?’ 생각하게 됐다.


● 나는 수영하는 법, 몸에 힘을 풀고 물에 뜨는 법을 몰라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순간이 있다. 그 두려움에 수영을 배우게 되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는 물에서보다 땅을 딛고 살아가며 죽을 뻔한 순간, 죽고 싶었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왜 잘 딛고 서기 위해, 땅에서 잘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까. 상처로 뭉쳐진 나의 마음을 몸의 언어를 통해 다시금 돌봄 받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 워크샵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몸을 구성하는 것 중 액체의 비율이 크다는 점이다.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닌데 몸을 만지고 움직이면서 다가오는 느낌이 낯설었다. 요즘은 무릎, 왼쪽 무릎이 계속 아프다. 한 자세를 유지하고 비대칭의 책상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세를 바로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워크샵을 하면서 예전에 했던 복싱 동작을 오랜만에 해 봤는데, 그런 동작은 ‘자세'와는 달리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모래놀이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에 타인의 리듬이 끼어드는 것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강제한다는 것은 한가지를 강요할 뿐 아니라, 순간마다 변하는 그 모든 움직임을 모른 척하고 없는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 손을 열 때는 서로 인사하는 느낌. 열어주면서 모르는 타인과도 가까워지는 기분. 닿는 손길이 불편하다가도 편해지는 시점이 찾아온 다음 따뜻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마음이 풀리는 변화. 꼭 접촉 때문 만이 아니더라도. 하지만 팔을 서로 꽉 짜줄 때는 (아마도 체벌이 키워드였던 만큼 더?) 손목이나 팔뚝을 붙잡혔던 기억이 다시 찾아왔고, 내 몸을 다시금 감각하는 신선함보다는 불편한 느낌이 부각되면서 나머지 시간은 쉬기로. 그래도 감각의 문제가 서로 환대한다는 자각을 크게 방해하진 않았고, 얼마나 어떤 기억이 오래 영향을 끼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 발과 깍지를 끼고 잔뜩 고통을 느낀 뒤, 처음으로 걸었을 때 뭔가 시원하고 부드럽고 안정적인 느낌이 나서 신기했다. 최근에는 어디에, 누구와 있어도 몸과 마음이 편치 못했다. 생각을 줄이는 약, 불안하지 않은 약, 잠이 오는 약들을 먹어도 생각과 불안과 걱정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을 신기한 경험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과 생고통…을 느낄 뿐인 것 같은데도 마음이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굳은 몸과 마음이 풀어지는 느낌? 왠지 오늘은 잠에 편히 들 것만 같다.


● 동작을 할 때 마다 몸이 편해졌습니다. 이 활동을 하기 전까지 몸이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었는데, 몸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난 후 나의 몸이 경직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며 생활했고, 그 긴장감이 몸에 베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 나를 해치는 아픔도 있지만, 회복하는 아픔이 있어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조금 더 정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나는 매일을 긴장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 온 몸의 근육은 다 딱딱하게 뭉쳐있다. 낯설고, 아프고, 어렵게 느껴지면 나는 근육에 힘을 주고 그저 가만히 있는다. 나도 모르게 신체가 지쳐간다. 그러다가도 긴장이 풀리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될 때 쯤이면 내 폐에서 공기를 느끼고, 근육도 숨을 쉬고, 마음이 편해진다. 그제서야 난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굳어있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아픔도 잊고 편안함도 잊어왔다.


● 손바닥 접촉을 했을 때 처음엔 아팠다. 왼손과 오른손의 느낌이 다르게 감각되었는데 초등학교 때 손바닥을 막대기로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 뒤로 어떤 부분이 계속 아픈 것 같다. 평소에 늘 아프지는 않지만 반죽하듯 만져졌을 때 잠시 잊혔던 통증이 떠오른 것 같다. 흔들리는 느낌이 재미있었다. 한편으로는 또 넘어질까봐 긴장되기도 했다. 공이 움직일 때, 사실 공이 무서웠다. 무서운 것은 움츠러들게 한다. 그래도 나중엔 점점 흥겨웠다. 공 놀이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지속하기 위해 나의 리듬과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하게 다가온다.


● 발바닥을 누르면서 자주 다치던 발목-발등 부분이 아파오는 걸 느꼈다. 몸에 쌓여있을 상처와 피로의 퇴적층을 생각한다. 학교에서 가장 많이 맞은 게 발바닥, 손바닥이었던 것 같은데, 몸을 단단히 경직되게 만드는 과정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다.(너무 많이 맞은 듯…) 돌리는 공 사이에 리듬을 맞춰 하는 활동이 가장 재미있으면서도 가장 긴장되고 어렵게 느껴졌다. 약간은 게임 같지만, 뭔가 재빠르게 성공해내야 한다는, 해법을 익혀야 한다는 습관이 스스로 느껴졌다.


● 내 몸을 마음대로 치고, 꼬집고, 건들고, 누르고, 찌르고, 발가벗으라고 했던 교사들과 어른들이 흔들림을 받아들이고 몸들에게 사과한다면, 우리는 다르게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 바닥이 딱딱하다. 앉으면 엉덩이가 아프다. 그렇다고 쪼그려 앉으면 다리가 아프다. 청소를 하고 물티슈로 닦았는데도 바닥이 더럽다. 발보다 손이 더럽다는데 맨발에 쓰레기가 붙어서 발이 더 더러워졌다. 처음에는 추웠는데 나중엔 몸을 움직이니 더러워졌다. 공에 많이 맞았다. 초반에는 몸이 아픈 행위들이 많았다. 왜 몸만 움직이다가 이 시간이 끝났을까? 배가 고프다. 끝나면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저녁을 공짜로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시장감이 깊어진다. 5월 5일이 마르크스 생일이라는데 오늘의 행위가 무슨 연관이 있었을까? 오늘은 내 몸을 혹사했다. 내 몸은 강사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 열등감이 느껴진다. 배가 더 고파진다. 8분 동안 글을 써야 한다는 게 힘들다. 글씨도 이상하다. 하지만 이런 글을 적어도 혼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모금결과와 사용 내역은 다음 주 중에 정리해서 따로 공개 예정입니다. 다시 한 번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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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은 국가폭력이다

국가가 조장한 체벌, 국가에 사과받자


학교에서 교육/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당연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제 학교에서의 체벌은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여러가지 형태의 폭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손이나 발, 도구를 이용한 폭력행위 외에도, 몸에 무리를 주는 자세나 동작을 시켜서 고통을 주고,

폭언이나 벌칙 등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훈육'하는 것은 인권침해입니다.


이는 비단 그런 방식으로 학생을 가르치려는 교사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교사 혼자서 여러명의 학생을 '통제' 해야 하고, 

학생들은 결코 감당 가능하지 않은 양의 교육과정을 꾸역꾸역 따라가야 하는

교실의 풍경, 교육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체벌은 국가의 책임입니다.

옛날에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방식입니다.

더 이상 교사가 인성이 나쁘다, 요즘 학생들은 싸가지가 없다로 서로 싸우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교사가 좀 더 여유있게 한 사람 한사람을 살필 수 있도록,

모두가 허겁지겁 교과 진도를 따라가느라 일률적인 모습을 강요받는 일이 없도록,

교육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폭력적인 교육을 경험했던 사람/세대들,

그리고 여전히 겉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폭력적인 교육을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학생들,

모두 국가에 책임을 묻고, 국가에 사과 받읍시다.





1. 국가는 학교에 대한 관리책임이 있습니다.


초ㆍ중등교육법 제6조에, 국립학교는 교육부장관의 지도ㆍ감독을 받으며, 공립ㆍ사립 학교는 교육감의 지도ㆍ감독을 받는다. 

라고 하여, 국가와 지방자체단체 행정 기관들이 각 학교를 감독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가에서 ‘인가’받아 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해서, 학교로 기능하기에 충분한지 검토하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국가에서는 학교 설비와 운영하는 교과목 등은 꼼꼼하게 따져 묻지만, 학생들의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인권침해적 내용이 담긴 학칙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징계의 내용 등은 학교의 ‘재량’이라며 인권을 보장하는 기준에 맞게 고치도록 강제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2. 한국은 1991년 국제아동권리협약을 비준했습니다.


한국에서 1991년에 비준한 유엔국제아동권리협약에는 제 19 조 (모든 형태의 폭력 및 학대로부터의 보호)라는 조문을 통해 아동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  당사국은 부모나 법정대리인, 기타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는 동안 모든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폭력, 상해나 학대, 방임 또는 방치하는 대우, 성적 학대를 포함한 가혹한 처우나 착취로부터 아동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적절한 입법적 행정적 사회적 및 교육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2. 이러한 보호조치는 아동 및 아동 양육자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계획의 수립과본 조 제1항에 규정된 아동학대 사례에 대한 다른 형태의 예방은 물론, 학대사례를 확인 보고 조회 조사 처리 추적하고 적절한 경우 사법적 개입이 가능한 효과적인 절차가 포함되어야 한다

 

더불어 유엔아동인권위원회의 8번 일반논평을 통해 근절되어야 할 폭력의 항목에 도구나 손으로 때리는 것과 더불어,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경시하는 것, 창피를 주는 것, 모욕하는 것, 겁을 주는 것, 아동을 비웃는 것이 포함된다고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국제협약/조약에 비준한다는 것은, 협약의 내용을 한국 안의 법과 동일하게 존중/적용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1991년에는 물론, 일반논평이 나온 2007년에도 그리고 현재 조차도 교육에서 폭력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교육부는 2011년 초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서 체벌을 일부 금지한 이후로는 어떠한 적극적인 법적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



3. 교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교육 제도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교육 현실 상, 교사가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의 체벌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 명의 교사가 일정한 수업시간동안 여러 명의 학생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기에 그 중 일부가 수업을 방해하거나, 집중하지 못하거나, 교사가 하라고 시킨 것을 하지 않으면 교실 안이 혼란스러워지고, 이를 짧은 시간 내에, 효과적으로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실에 조용히 앉아서, 교사가 지시하는 대로 일사불란하게 같은 것을 하는 교육의 모습이 모두에게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학교 시스템은 일부의 집중 잘 하고, 차분하고, 얌전하고, 학습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의가 쉽게 흐트러지고, 다양한 것을 하고 싶어 하고, 딴 짓도 하고 싶어 하는 보통사람 또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도록 디자인 되어야 합니다.

산만한 사람에게 벌을 주고 겁을 주어 차분한 사람으로 ‘가공하는’ 것, 그래서 학교 교과목들이 전달하는 지식을 잘 외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교육의 구조는 그대로 둔 채, 한 교실을 교사가 혼자서 감당해 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체벌이라는 폭력적인 경험을 국가의 책임 하에 있는 공공기관에서 학생 모두가 경험하도록 방치하는 것 역시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부당한 일입니다.

획일적이고 경쟁적인, 체벌 없이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교육제도를 바꿔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