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체벌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다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체벌은 국가폭력이다" 캠페인을 시작하며
빈둥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왜 학생이 경험하는 '체벌'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을까? 학생인권조례가 처음 제정된 지 13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체벌은 너무 심한 것은 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있어도 될 일"이라는 말을 쉽게 들어볼 수 있다. 법정에서도 교사에 의한 학생 폭력은 고의성과 상해 정도 등을 따지면서 '체벌' 자체를 폭력으로 보기보다는 업무로 인한 행위, 법령에 의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행위인지 판단하고 선고를 내린다. 체벌이 형식적으로는 범죄나 불법 행위의 조건을 갖추지만 실질적으로 위법이 아니라며 예외 사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비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적 목적이라면 때려도 된다고 말하는 국가 운영 기관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사회 전반이 청소년·학생이 겪는 폭력에 무감각함을 인지하고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올해부터 체벌에 대한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공론화하기 위해 '체벌은 국가폭력이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체벌이 왜 국가에게 책임이 있고, 또 국가폭력인지 의문을 갖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은 해당 의문에 답하면서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고 사회적 반성과 변화를 위해 공적 논의로의 전환을 말하고자 한다.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 말하기
체벌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대다수가 경험하거나 경험했던,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구조적 부정의이지만, 청소년·학생이 갖는 공통된 위치에서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쉽다. 사회와 어른들은 '맞을 만한 일을 했으니 때리는 거'라며 피해를 경험한 청소년·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어린 시절의 고통에 대해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면서 체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
2000년대 이후 청소년인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고, 부족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초·중등교육법 개정, 아동복지법 개정, 민법에서의 자녀 징계권 삭제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청소년·학생을 때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법과 제도만 만들었을 뿐 나이 어린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나 체벌 금지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 개선과 실천을 요구하는 적극적 행동이 함께 이뤄지지는 못했다. 여전히 "청소년·학생은 잘못을 하면 맞아야 된다"라는 말이 쉽게 수용된다는 것은 청소년·학생에 대한 폭력이 이 사회에서 아직 파기되지 않은 규칙이고, 질서라는 증거이다.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는 대개 피해의 경중을 따지면서 폭력을 가한 교사와 피해를 입은 학생 개인 간의 문제로만 축소되어 다루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체벌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구조화된 폭력으로 크게 인식되지 못했다. 교사가 체벌의 행위자로 있기 때문에 국가가 표면화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사가 체벌을 선택하게 되는 배경과 조건에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어 온 맥락이 있다. 가령 1999년, 국회에서는 교육적 필요성과 적절성에 따라 교사의 체벌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추진했고, 2000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교육적 목적을 띤 허용 범위 내의 체벌은 정당하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2002년, 교육부에서는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센티미터 내외·길이 60센티미터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부위는 남자 둔부·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 체벌의 기준을 상세히 제시한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했다. 이는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집행된, 체벌을 조장하는 구조적 과정을 구성해온 장면들이다.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체벌이 제도적 관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체벌은 교사 개인의 선택이자 책임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학교는 정부의 통제 아래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제도로서 확립되어 왔다. 청소년·학생에게 매를 때리는 게 사랑이고 교육이라 정당화하는 사회 구조와 학생을 통제하는 학교의 비합리적 규율과 문화 아래에서, 교사가 체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가 개인의 책임으로만 한정되어 논의되는 것은 공평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체벌은 국가가 묵인하고, 때때로 주도해온 것이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임에도 국가는 청소년·학생에 대해서 그 책무를 소홀히 해왔다. 국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청소년·학생인권의 보장을 위해 법제도 및 정책 등을 보완하고 수립하며 바로잡음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체벌을 국가폭력으로 명명하기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만 이를 '국가폭력'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도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형법적 정의는 아직 없고, 용어의 범위는 넓고 불분명하다. 또한 기존에 국가폭력에 대한 피해를 드러내는 일이 과거사 바로잡기의 특정 사건 위주로 이루어져온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국가폭력은 "각종 차별과 불평등 관계를 창출·정당화·강화·변명하기 위해 시도하며, 국가가 묵인하거나 주도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Nagengast 1994, 114)으로 정의되기도 하며, 따라서 국가 자체는 폭력을 행사하는 1차적 행위자로 등장할 수도, 표면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홍성흡, '국가폭력 연구의 최근 경향과 새로운 연구방향의 모색', <민주주의와 인권> 제7권 제1호, 전남대 5.18연구소, 2007.) 이러한 맥락에서 체벌은 국가폭력의 정의에 부합한다. 제도화된 억압적 국가기구인 학교가 청소년·학생에 대해 폭행과 폭언, 통제와 감시, 의사표현 억압 등 여러 형태로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가해 상황을 묵과하거나 내버려두는 경우도 국가폭력의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체벌이 헌법상 기본권의 침해에 해당할 뿐 아니라 형법상 상해죄, 폭행죄, 폭행치상죄, 업무상과실상해죄, 학대죄,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 구성요건에 해당함에도 '교육상 필요'나 '교내 질서유지' 명목으로 정당화되어 온 측면을 생각해보자. 교육부는 체벌 금지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꾸준히 체벌 금지를 반대하거나 부분적으론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왔다. 2020년, 법원은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엎드려뻗쳐 후 일어나게 한 체벌에 대해 학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며, 이 같은 행위를 모두 학대로 본다면 학대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진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가해 교사가 학생의 머리를 잡고 창문에 밀어 넣은 행위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지도 방식이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취지의 독려 행위로 판단했다.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이러한 법원의 판단과 판결은 청소년·학생이 겪는 폭력, 즉 학대의 범위를 좁게 해석해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학생에 대한 통제가 학생이 갖는 신체적 자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보다 앞설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청소년·학생이 겪는 불합리성을 지속시키고, 그들을 불평등한 위치에 남게 하는 행위이다. 교육을 들먹이며 청소년·학생을 맞아도 되는 존재, 맞을 만한 존재로 간주하고 사회적으로 해당 집단에 대한 폭력을 수용하게 만들어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건 국가에게 이러한 구조적 폭력과 불평등을 제한할 책임이 있음에도 이런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폭력으로 이름 붙임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 사회에서 체벌을 없애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체벌을 금지하라는 요구가 커지자, 청소년·학생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한 이들은 체벌에 대한 대안을 요구해왔다. 그럴 때마다 '체벌을 하지 않는 것이 체벌의 대안'이라고 답해왔지만, 사실 개개인이 체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논의가 그쳐서는 안 된다. 체벌은 청소년·학생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고, 그들이 갖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개선과 함께 바로잡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벌의 구조적 과정을 끊기 위해 체벌을 경험한 이들이 함께 구조적 불평등성, 부정의를 말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체벌의 경험으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그 해로움에 대해 말하고 증언을 기록하면서 체벌을 방치하고 조장해온 국가 차원의 논의와 정책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청소년·학생이 인권이 보장받을 수 있는 정책을 만들도록 요구하며 공적인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체벌, 즉 청소년·학생에 대한 폭력을 경험한 이들, 그리고 체벌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주요 책임은 계속해서 국가·정부와 권력 있는 이들이 야기하는 피해를 계속해서 말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것이 아닐까. 체벌이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성찰하고 폭로하고, 국가의 책임을 계속해서 소환해 체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정책 등을 비판하고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구조적 과정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다. 집단적 저항을 통해 체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소환하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함으로써 정말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인권을 말하다]는 지음의 활동가들이 함께 작성하며, '프레시안'을 통해 기고합니다.
학교 체벌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다
[청소년 인권을 말하다] "체벌은 국가폭력이다" 캠페인을 시작하며
빈둥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 활동가)
왜 학생이 경험하는 '체벌'은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을까? 학생인권조례가 처음 제정된 지 13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체벌은 너무 심한 것은 문제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있어도 될 일"이라는 말을 쉽게 들어볼 수 있다. 법정에서도 교사에 의한 학생 폭력은 고의성과 상해 정도 등을 따지면서 '체벌' 자체를 폭력으로 보기보다는 업무로 인한 행위, 법령에 의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행위인지 판단하고 선고를 내린다. 체벌이 형식적으로는 범죄나 불법 행위의 조건을 갖추지만 실질적으로 위법이 아니라며 예외 사유를 허용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비청소년을 대상으로 교육적 목적이라면 때려도 된다고 말하는 국가 운영 기관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사회 전반이 청소년·학생이 겪는 폭력에 무감각함을 인지하고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올해부터 체벌에 대한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공론화하기 위해 '체벌은 국가폭력이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체벌이 왜 국가에게 책임이 있고, 또 국가폭력인지 의문을 갖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은 해당 의문에 답하면서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확인하고 사회적 반성과 변화를 위해 공적 논의로의 전환을 말하고자 한다.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 말하기
체벌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대다수가 경험하거나 경험했던,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구조적 부정의이지만, 청소년·학생이 갖는 공통된 위치에서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쉽다. 사회와 어른들은 '맞을 만한 일을 했으니 때리는 거'라며 피해를 경험한 청소년·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어린 시절의 고통에 대해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면서 체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어렵게 했다.
2000년대 이후 청소년인권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고, 부족하지만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초·중등교육법 개정, 아동복지법 개정, 민법에서의 자녀 징계권 삭제 등이 이루어지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청소년·학생을 때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하지만 법과 제도만 만들었을 뿐 나이 어린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나 체벌 금지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 개선과 실천을 요구하는 적극적 행동이 함께 이뤄지지는 못했다. 여전히 "청소년·학생은 잘못을 하면 맞아야 된다"라는 말이 쉽게 수용된다는 것은 청소년·학생에 대한 폭력이 이 사회에서 아직 파기되지 않은 규칙이고, 질서라는 증거이다.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는 대개 피해의 경중을 따지면서 폭력을 가한 교사와 피해를 입은 학생 개인 간의 문제로만 축소되어 다루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체벌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한, 구조화된 폭력으로 크게 인식되지 못했다. 교사가 체벌의 행위자로 있기 때문에 국가가 표면화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사가 체벌을 선택하게 되는 배경과 조건에는 국가에 의해 장려되어 온 맥락이 있다. 가령 1999년, 국회에서는 교육적 필요성과 적절성에 따라 교사의 체벌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추진했고, 2000년, 헌법재판소에서는 교육적 목적을 띤 허용 범위 내의 체벌은 정당하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2002년, 교육부에서는 '별도의 장소에서 제3자를 동반하여 실시, 체벌 도구는 지름 1.5센티미터 내외·길이 60센티미터 이하의 직선형 나무, 체벌부위는 남자 둔부·여자 대퇴부, 1회 체벌봉 사용 횟수는 10회 이내' 등 체벌의 기준을 상세히 제시한 '학교생활규정 예시안'을 발표했다. 이는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집행된, 체벌을 조장하는 구조적 과정을 구성해온 장면들이다.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체벌이 제도적 관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체벌은 교사 개인의 선택이자 책임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학교는 정부의 통제 아래 국가가 관리하는 교육제도로서 확립되어 왔다. 청소년·학생에게 매를 때리는 게 사랑이고 교육이라 정당화하는 사회 구조와 학생을 통제하는 학교의 비합리적 규율과 문화 아래에서, 교사가 체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학교에서의 체벌 문제가 개인의 책임으로만 한정되어 논의되는 것은 공평하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체벌은 국가가 묵인하고, 때때로 주도해온 것이다.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임에도 국가는 청소년·학생에 대해서 그 책무를 소홀히 해왔다. 국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청소년·학생인권의 보장을 위해 법제도 및 정책 등을 보완하고 수립하며 바로잡음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체벌을 국가폭력으로 명명하기
체벌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인정하지만 이를 '국가폭력'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도 있을 것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형법적 정의는 아직 없고, 용어의 범위는 넓고 불분명하다. 또한 기존에 국가폭력에 대한 피해를 드러내는 일이 과거사 바로잡기의 특정 사건 위주로 이루어져온 영향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국가폭력은 "각종 차별과 불평등 관계를 창출·정당화·강화·변명하기 위해 시도하며, 국가가 묵인하거나 주도하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Nagengast 1994, 114)으로 정의되기도 하며, 따라서 국가 자체는 폭력을 행사하는 1차적 행위자로 등장할 수도, 표면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 (홍성흡, '국가폭력 연구의 최근 경향과 새로운 연구방향의 모색', <민주주의와 인권> 제7권 제1호, 전남대 5.18연구소, 2007.) 이러한 맥락에서 체벌은 국가폭력의 정의에 부합한다. 제도화된 억압적 국가기구인 학교가 청소년·학생에 대해 폭행과 폭언, 통제와 감시, 의사표현 억압 등 여러 형태로 폭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가해 상황을 묵과하거나 내버려두는 경우도 국가폭력의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체벌이 헌법상 기본권의 침해에 해당할 뿐 아니라 형법상 상해죄, 폭행죄, 폭행치상죄, 업무상과실상해죄, 학대죄,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 구성요건에 해당함에도 '교육상 필요'나 '교내 질서유지' 명목으로 정당화되어 온 측면을 생각해보자. 교육부는 체벌 금지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꾸준히 체벌 금지를 반대하거나 부분적으론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서왔다. 2020년, 법원은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엎드려뻗쳐 후 일어나게 한 체벌에 대해 학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며, 이 같은 행위를 모두 학대로 본다면 학대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진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가해 교사가 학생의 머리를 잡고 창문에 밀어 넣은 행위에 대해서도 부적절한 지도 방식이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취지의 독려 행위로 판단했다.
최근까지도 이어지는 이러한 법원의 판단과 판결은 청소년·학생이 겪는 폭력, 즉 학대의 범위를 좁게 해석해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학생에 대한 통제가 학생이 갖는 신체적 자유,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보다 앞설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청소년·학생이 겪는 불합리성을 지속시키고, 그들을 불평등한 위치에 남게 하는 행위이다. 교육을 들먹이며 청소년·학생을 맞아도 되는 존재, 맞을 만한 존재로 간주하고 사회적으로 해당 집단에 대한 폭력을 수용하게 만들어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건 국가에게 이러한 구조적 폭력과 불평등을 제한할 책임이 있음에도 이런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사실상 국가폭력으로 이름 붙임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 사회에서 체벌을 없애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체벌을 금지하라는 요구가 커지자, 청소년·학생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한 이들은 체벌에 대한 대안을 요구해왔다. 그럴 때마다 '체벌을 하지 않는 것이 체벌의 대안'이라고 답해왔지만, 사실 개개인이 체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논의가 그쳐서는 안 된다. 체벌은 청소년·학생에 대한 구조적 폭력이고, 그들이 갖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개선과 함께 바로잡아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벌의 구조적 과정을 끊기 위해 체벌을 경험한 이들이 함께 구조적 불평등성, 부정의를 말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체벌의 경험으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그 해로움에 대해 말하고 증언을 기록하면서 체벌을 방치하고 조장해온 국가 차원의 논의와 정책에 대해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청소년·학생이 인권이 보장받을 수 있는 정책을 만들도록 요구하며 공적인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
체벌, 즉 청소년·학생에 대한 폭력을 경험한 이들, 그리고 체벌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주요 책임은 계속해서 국가·정부와 권력 있는 이들이 야기하는 피해를 계속해서 말하고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것이 아닐까. 체벌이 어떤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성찰하고 폭로하고, 국가의 책임을 계속해서 소환해 체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정책 등을 비판하고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구조적 과정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다. 집단적 저항을 통해 체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변화시킬 것을 요구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소환하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함으로써 정말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인권을 말하다]는 지음의 활동가들이 함께 작성하며, '프레시안'을 통해 기고합니다.